"카리용 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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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잘 지내지 못했던 몽칼름과 보드레이유는 영국군에 대한 방법에 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 프랑스군의 구성은 5,000명의 정규군에 약 6,000명의 민병대, 그리고 인원면에서 제한된 동맹 인디언 전사들뿐이었다. 이에 반해 영국군은 5만명으로 보고되어 있었다. 전투 경험은 별로 없었던 보드레이유는 프랑스군을 카리용과 루이스버그에 각각 5,000명씩 나누길 바랐다. 그 후에 3,500명의 엄선한 병력을 뉴욕 식민지 북서부에 있는 모호크 강으로 파견하고자 했다. 몽칼름은 그것을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이 방식은 영국군은 아주 간단하게, 방어전에 사람을 할애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보드레이유의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몽칼름은 1758년 6월, 퀘벡에서 카리용으로 향했다.
=== 영국군의 준비 ===
제임스 에버크롬비 장군 하에 영국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병력을 모았다. 이 요새는 조지 호수 남단에 있었지만, 전년의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전 후 파괴되어 있었다. 군은 총 16,000명이었으며, 1758년의 이 시점에서 북아메리카에 배치된 군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원군으로 존 머레이의 제42 보병연대​​보병연대(하이랜드 연대 첫째 대대)와 제27 보병연대​​보병연대, 제44 보병연대​​보병연대, 제46 보병연대, 제55 보병연대로 구성된 6,000명의 정규 부대, 그리고 제60 보병연대의 1 대대와 4대대, 또한, 뉴잉글랜드의 코네티컷, 매사추세츠만, 뉴욕, 뉴저지, 로드아일랜드의 각 식민지의 민병대가 있었다. 1758년 7월 5일, 이 부대는 배에 탑승, 다음 날인 6일 조지 호수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 프랑스군의 준비 ===
몽칼름이 도착하기 전 카리용 요새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것은 프랑스와 샤를 드 부르라마끄 대령으로 [[6월 23일]] 경에 영국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할 것을 알게 되었다. 부르라마끄는 6월 10일에 보드레이유를 통해 에버크롬비에게 편지(대립하는 지휘관끼리 주고받는 의례적인 인사의 일환)를 전령에게 보내게 하고, 그 전령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전령은 영국군의 주둔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에게 잡혀있었다. 부르라마끄는 정찰 활동을 확대하고, 또한 포로로 잡은 영국 척후병에게서 영국군의 대략적인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6월 30일]], 몽칼름이 카리용 요새에 도착했다. 거기서 본 것은 확연히 병력이 부족한 주둔 부대였다. 병력은 3,500명밖에 없고, 식량은 9일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르라마끄는 몽칼름에게 영국군 2만명 이상이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집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몽칼름은 요새에 접근해 올 많은 적에 대한 방어전략을 취했다. 몽칼름은 즉시, 부르라마끄와 3개 대대를 파견하여 6마일(9.7 km) 떨어진 조지 호수의 북단에서 2마일 (3.2 km) 떨어진 도하지점을 점령하고, 제재소의 전진 기지를 강화하게 하였다. 나머지 잔류 병력은 요새 밖의 추가적인 방어 시설 마련에 투입하였다. 몽칼름 또한 이 상황을 ​​몬트리올에몬트리올에 전하고 가능하다면, 레비와 그 병력을 증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레비 병력은 브드레이유가 서쪽 변경 요새를 방어 임무를 맡았던 병력이었다. 레비는 아직 서쪽으로 떠나 않았고, 브드레이유는 그와 4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서쪽이 ​​아니라아니라 카리용으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이 몬트리올을 떠난 것은 [[7월 2일]]이었다. 7월 5일에 부르라마끄가 답장을 받았을 때, 영국 함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트레뻬제 대위와 350명의 부대를 보내, 함대를 감시하게 하고 가능하면 상륙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영국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조지 호수의 수면을 덮어 버릴 정도의 규모’라고 했다. 몽칼름은 부르라마끄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방비 태세에 만족해 있던 부르라마끄는 몽칼름으로부터 세 차례 퇴각 명령을 받을 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작전 범위를 알게 된 몽칼름은 모든 병력을 카리용 요새로 후퇴시켰고, 수로와 교량을 파괴했다. 이 퇴각으로 트레뻬제 군은 본대로부터 고립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인디언의 척후가 영국 함대의 규모를 두려워 해서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7월 6일]]의 황혼 때 프랑스군은 요새의 북서쪽 1.2 km 떨어진 고지대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이 언덕은 요새로 향하는 진격로가 될 길이었다. [[7월 7일]], 참호 아래에 상당한 길이에 걸쳐 울타리(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가시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울타리)를 둘렀다. 날이 저물 무렵, 참호 위로 흉벽을 둘렀다. 이 급조된 방어시설은 총격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영국군 대포 공격에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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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저스 레인저스와 [[토마스 게이지]] 대령의 제 80 경보병 연대​​가연대가 요새에 머물고 있던 몇몇 프랑스 척후를 참호로 몰아넣었다. 이 경보병 부대의 뒤에는 뉴욕과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고, 3열 종대로 공격을 하기 위해 일반병이 식민지 병사의 사이를 진군했다. 우익 제27대와 제60대, 제27 군단은 지휘관인 윌리엄 하비랜드 중령의 지휘 하에 있었고, 중앙군 제44대와 제 55 군단은 존 도날드슨 중령이, 그리고 좌익 제 42대와 제46대, 제42대는 프란시스 그랜트 중령이 맡고 있었다. 각 열의 뒤에는 연대의 경보병 중대가 따랐고, 코네티컷과 뉴저지의 식민지의 예비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몽칼름은 프랑스군을 3개 여단과 예비대로 나누어야 했다. 그는 참호로 연결된 중앙 부분에 로얄 루숀 연대​​와연대와 베리 연대​​의연대의 지휘를 맡았고, 레비는 우익 베아루느 연대와 규이엔느 연대, 그리고 라 렌느 연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부르라마끄는 좌익으로 라 사르 연대​​와연대와 라 사르 연대​​를연대를 지휘했다.
 
각각의 부대가 참호에서 대충 100 야드(91m) 거리에서 방어에 임했다. 요새 내 대포가 참호 측면을 지키고 있었지만, 우익 쪽은 불완전했다. 좌익과 라슈트 강 사이의 낮은 지대는 민병과 해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카리용 방어를 위해 가시울타리를 설치했다. 예비군은 카리용 요새나 호프 산 사이에 배치되었다. 각 부대에 예비군이 흩어져 있어 필요한 때에는 원군을 보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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