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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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춘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한국군 6사단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측 후방이 노출되는 상황이 되어 균형이 맞지 않게 되고 북한의 주공격군은 3일간을 서울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춘천지구의 한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기습공격에도 조선인민군의 전력을 40% 이상 격파하는 전과를 세웠다. 결국에 조선인민군 2만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만것이다. 한국군 6사단은 3일간 조선인민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조선인민군은 애초 작전 계획보다 2일 뒤인(3일만에) 6월 27일 저녁 10시에야 겨우 춘천을 점령했고, 7월 1일에야 겨우 양평쪽의 한강을 건넌 뒤에 7월 5일에 이천,용인에 이르게 되어 서울에서 내려와 수원,오산을 점령한 조선인민군과 합류하였다. 이 결과로, 한국군을 수원 이북에서 포위,섬멸하겠다는 조선인민군의 작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군은 급히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6월 28일 이후 도강한 개별적으로 후퇴한 패잔병들과 낙오병들을 긁어모아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부대와 합치는 식으로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춘천 전투 이후에 조선인민군은 전쟁을 수행했던 조선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해임조치하였다.<ref>김종오, 《변질되어가는 한국현대사의 실상 上》(종소리, 1989), 249쪽.</ref><ref>김영호, 〈한국전쟁 연구의 향후 과제와 전망〉</ref><ref>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백산서당, 2000), 103쪽</ref> 또한 조선인민군은 결전 시도해야 할 장소와 시기 분별 못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전투의 실패를 언급하며 반면 한국군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찾아 유엔군이 증원될 수 있는 시간 갖고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에서의 반격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 관련 도서 ==
*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년. {{ISBN|978-89-3647-596-3}}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