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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7월 21일]](음력 6월 18일) [[경상북도|경북]] [[영천시|영천]]에서 출생한 김성칠은 학창 시절에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 등으로 인해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했으나, [[일본]]의 [[도요쿠니중학]]을 졸업,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경성대학]]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근무하며 여러 도서를 출판, 번역하였다. [[한국 전쟁]] 때 [[서울특별시|서울]]에 남아 전쟁의 실상을 목격하며 《[[역사 앞에서]]》를 저술하였다. [[1951년]], 고향 [[영천시|영천]]에서 신원 불상자에게 저격당해 사망한다.
 
=== 유년기 ===
면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상한(金相漢)과 조(趙)씨의 4녀 1남 중 2대 독자인 막내로 태어났다. 10세 무렵, 태극기를 그리고 가슴에 달아 파닥거렸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민족 의식이 투철하였다. 15세였던 [[1927년]]에 신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북고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담임 교사였으며, 훗날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박종홍]]을 만나 일생에 거쳐 가르침을 받게 된다. 입학 후 교우들과 함께 좌익 독서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독립 의식을 가꾸기 시작한다. 동년 11월에 독립운동가 [[황보선]] 등과 함께 비밀 결사 구화회(丘火會)를 조직, 문화부 위원을 역임했으며, 12월에는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한다. 이듬해인 [[1928년]] 2월, 경북 지방 좌익 운동의 중심 인물 [[장적우]]와 [[윤장혁]]이 지도하는 적우동맹(赤友同盟)을 결성하여 중앙간부 정치문화부 위원과 제1그룹 책임자가 되었으며, 5월에는 적우동맹 산하 밝세회[曙光會]를 조직, 조직부 위원을 맡았다. 이 해 9월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중심의 5개 비밀결사대가 주동하는 동맹휴학인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에 가담하였고, [[11월 6일]]에 검거되었다. 1심에서 징역 2년을 받아 1년간 미결수로 복역했고, [[1930년]]에 예정된 2심에서 판결되기 전에 나이가 어리다는 사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와 함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 처리가 되어 고향에 내려가 농사일을 하며 일본에서 새 품종인 대팔주(大八注)를 수입하는 등 활발한 농촌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를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었고, 수령한 상금으로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현 [[모지시|모지]](門司)시에 소재한 [[도요쿠니중학]](豊國中學)에 편입, [[1934년]]에 졸업하였다.
 
[[1934년]] 3월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이때에도 농촌 관련 글을 [[동아일보]] 등 여러 매체에 게재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년]] 2월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농업협동조합 (대한민국)|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 취직하여, [[전라남도]] [[담양군]] 대치(大峙), [[경상북도]] 금호(琴湖)와 [[영일군]] 장기(長鬐)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로 근무하였다. 금융조합에 재직 중이던 [[1940년]]에는 [[펄 벅]]의 《[[대지 (소설)|대지]]》를 번역, 출간하는가 하면, [[제주도]]를 여행한 후 기행기를 집필 및 연재하기도 했다. [[1941년]]에는 대구 [[팔공산]]에서 《[[용비어천가]]》를 한역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일본제국의 정책에 따라 김광성칠(金光聖七)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동년에 금융조합을 퇴사하고 이듬해인 [[1942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절에 과거 금융조합에서 함께 일하며 농촌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시게마쓰 타카모토]](重松髜修)의 《朝鮮農村物語》를 편집, 번역한 《조선농촌담(朝鮮農村譚)》을 출간한다. [[1943년]], [[일제]]의 학병 출병에 반발하여 징용자 수용소에 갇혔으나, 수용소장 우이타 카나메(海田要)가 경성법학전문학교 시절 김성칠의 훈련 교관이었기에 그의 도움으로 병을 핑계로 풀려날 수 있었고, 다시 [[농업협동조합 (대한민국)|금융조합]] 이사로 복직하여 [[충청남도]] [[제천시|제천]] 봉양(鳳陽)에서 근무하였다. 봉양에서 일하던 [[1944년]],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전공하며 안면을 쌓았던 [[이남덕]]과 결혼한다. 이듬해 [[1945년]]에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 친구 강경석과 함께 사숙(私塾) 설립 등을 논의하는 등 청년 교육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다.
 
=== 중년기 ===
1945년 [[11월 18일]] 금융조합 본부 지도과장으로 인사발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1946년]] [[서울대학교|경성대학]]에 복학, 졸업한 후 동 대학 사학과 조수로 임용되어 동양사연구실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모교인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전임교수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대신, 시간강사로 출강하며 한국사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본격적으로 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자 김성칠은 금융조합을 사직했으며, 《조선역사》를 출간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4월에 [[제천고등여학교]] 교장직을 제안받는 일도 있었다. 이 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명조사연구회를 조직, 한자로 된 각 지역 지명의 순한글 이름을 발굴하는 연구를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4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1948년]]부터는 《[[용비어천가]]》, 《[[열하일기]]》, 《[[초당 (소설)|초당]]》 등을 번역하는 데에 힘을 쓰기도 했고 교과서 《중등사회생활과 이웃나라의 생활 역사》를 공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 한국 전쟁 시기 ===
[[1950년]] 당시 김성칠과 그의 가족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과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362번지 손가장)에서 지냈는데, 이때 [[한국 전쟁]]을 겪게 된다.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에서 이루어진 서울대학교 교원심사에서 파면 처리되며 집에서 농사를 짓는 삶을 보낸다. 당시 [[의용군]]으로 징용하는 등 사회의 분위기가 험악하였으므로, 농사일을 그만두고 자택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동년 [[9월 28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의 심사를 통해 교수로 복직했으며, 12월에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제의를 받아 상임위원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1.4 후퇴]]를 앞두고 시국이 어수선하여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김성칠은 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점령을 번갈아 목도하며 느낀 전쟁의 실태와 아픔을 일기로 기록했다. 이 일기는 [[냉전]]이 종식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이 부풀어 오르던 [[1993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수로 지낸 아내 [[이남덕]]의 주도 아래 《[[역사 앞에서]]》라는 책으로 출판된다.<ref>{{웹 인용|title=사학자 남편의 「6·25일기」 발간한 고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낸 이화여대 교수 이남덕 씨|url=https://news.joins.com/article/2789496|accessdate=2020-07-15}}</ref>
 
=== 사망 ===
[[1951년]] 1월에 부친상을 당했고, 3월에 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직을 사임, 강의에 열중했다. [[10월 8일]]에 [[중양절]]을 맞아 부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고향 [[경상북도]] [[영천시|영천]]으로 내려갔다가 다음날인 [[10월 9일]] 새벽에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 [[이철]]
* [[이인]]
* [[박종홍]]
* [[독은기]]
* [[강신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