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전쟁 (프톨레마이오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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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170년 ~ 기원전 168년)==
이 갈등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70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두 명의 섭정인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셀레우코스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4세|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같은 해 이집트의 단합을 강화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통치자로 선언되었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가 [[펠루시움]]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도시를 신속하게 점령하면서 우위를 점하되자, 군대를 움직였다. 이집트인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며,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전복되었고, 두 명의 새로운 섭정인 코마누스와 키네아스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특사를 파견하여 안티오코스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고자 했다.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ref>안티오코스 4세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를클레오파트라 2세를 낳았고 남매가 혼인하여 왕과 왕비가남매끼리 되었다결혼하였다. 이들 남매는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가 된다.</ref>를 그의 후견 하에 두고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알렉산드리아 백성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을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보급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기원전 169년]] 말에 군대를 철수했다.
 
그가 없어지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그의 형제들은 화해를 했다. 왕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분노한 안티오코스는 다시 침략했다. 이집트인들은 로마로 도움을 청했고, [[로마 원로원]]은 알렉산드리아에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파견했다. 그 사이에, 안티오코스는 [[키프로스]]와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알렉산드리아로 행진하고 있었다. 수도 외곽인 엘레우시스에서 그는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만났다. 그들은 로마에 머무는 동안 친구였지만, 친절한 환영 대신에, 포필리우스는 국왕에게 즉시 [[이집트]]와 [[키프로스]]로부터 즉각 물러나야 한다는 원로원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안티오코스는 고려할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모래 위에 원을 그리며 그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결정하라고 했다. 안티오코스는 로마 최후통첩에 순종하기로 결정했다. ‘엘레우시스의 날’은 제6차 시리아 전쟁과 안티오코스의 이집트 영토 정복의 희망을 무산시켰다.<ref>Edouard Will, ''L'histoire politique du monde hellénistique'' (Editions du Seuil, 2003 ed.) Tome II, pp.311-32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