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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무 신정]](建武の新政)으로 일시 황통은 다이카쿠지 황통(고다이고 천황계)로 통일될 듯 보였으나, 2년 반만에 겐무 신정은 붕괴했다. 요시노(吉野)로 달아난 고다이고 천황이 남조(南朝)를 선포하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에 의해 옹립된 지묘인 황통의 천황이 북조(北朝)로써 대립하게 되어, 일본은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 때에 교토를 탈환하고 일시적으로 연호를 통일하였으나(쇼헤이 일통) 이마저도 반년만에 붕괴해버렸다. 훗날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알선으로 정식 양위 의식을 행하는 동시에 이후의 황위 계승에 대해서는 양통질립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다이카쿠지 황통의 [[고가메야마고카메야마 천황]](後亀山天皇)이 [[삼종신기]](三種の神器)를 지묘인 황통의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에게 넘겨주고, 난보쿠초 시대의 분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남조측의 교토 입성에 즈음해 신기 귀환의 의식은 이루어졌으나 정식 양위 의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가메야마고카메야마 천황에 대한 처우는 「천황으로써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상황으로 예우한다」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황위가 지묘인 황통으로 굳어지면서, 다이카쿠지 계통의 황손들은 불만을 품고 옛 남조의 유신(遺臣)들이 궁중의 신기를 탈취하는 등의 저항을 15세기 반까지 지속하였다(후남조).
 
[[분류:가마쿠라 시대 교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