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185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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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특사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사망하였다.|《헤트·화데란트》|1907년 7월 15일자 기사}}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결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한민족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결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ref name="역사비평"/>{{참고 쪽|241}}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ref name="역사비평">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년</ref><ref>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년. p.307</ref>{{참고 쪽|}}<ref>김승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674555 <이준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연합뉴스, 2007년 6월 23일</ref> 물론 이준이 할복이 아닌 병사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민족의 앞날을 걱정한 이준의 민족의식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특별시|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이준열사기념교회(감리교)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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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준의 할복 자결은 분명하다.<ref>
그의 아들인 李鏞장군을 추적과정에서 광동성 일본 총영사 보고 문건에 '자살한 이준'으로 나온다. 이외에 일본의 다른 문건에서도 역시 같은 문귀가 보인다.
日本人 史家(사가)로서 朝鮮硏究會主幹이요, 京城新聞社長인 아오야나기(靑柳南冥)가 저술한 「朝鮮史話와 史蹟」이라는 책은, 朝蘇總督 齊藤實과 學者 菊池謙讓이 서문까지 쓴 것으로 朝蘇硏究會藏으로 되어 있다.
이 著書가운데에 李儁烈士(이준열사)에 대한 기록이 海牙密使秘話 <上> <中> <下>로 되어 비교적 여러 장 나와 있다. 그 한 곳을 보면
 
「翌日の會議場に, 該返電は會議長より持ち出された, そして三人の密使は, 爲はりの使節として會議長より, 卽時退場を命せられた.密使の一人李儁は逆上して,
護身用として所持せし短刀を以て割腹し, 自殺を 遂けた, 時に明治四十年・・・・・・・・・・・・・・使節等書らす所の使命は査然 失敗に終つたので, 二人は更に別策を講じ, 此の平和會議中に一般外人に・・・・」
 
위와 같이 이준열사가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단도로 할복 자살했다고 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일본 신문에서는 일본 첩자에 의한 암살설을 보도했다고도 한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할복 자살한 것은 자기들에게 큰 타격 이었으나 저자는 일말의 양심을 버리지 못하고 사실대로 저술한 것이다. 이외에도 중국이나 미국등 다른 문건들에도 자결 확인 문건들이 다수 있다.
</ref> 당시 일본은 억압에 대한 조선민중의 동요를 막고자 터무니 없는 종기설을 날조, 유포하였다.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특별시|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이준열사기념교회(감리교)가 건립되어 있다.
 
== 가족 관계 ==
* 아들 : [[이용 (1888년)|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