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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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kyu11.gif|섬네일|오른쪽|180px|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 (조선)|김지성]](김용원)은 민씨정권의민씨 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ref name="위클리조선2"/>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ref name="위클리조선2"/>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경주 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 지금의 [[경신고등학교 (서울)|경신중고등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ref>윤중식,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1090743&code=23111816 새문안교회 - 한국 장로교단 꼿꼿한 ‘'21세 어머니'] {{웨이백|url=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1090743&code=23111816# |date=20100830022626 }}, [[국민일보]]</ref>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직원 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ref name="크리스" />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ref name="크리스1">[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83147 [허명섭 칼럼&#93;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봇이 붙인 제목 -->]</ref>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ref>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약사|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군|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ref name="크리스1"/>
 
=====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 =====
[[파일:조선 최초의 유아세례자.png|섬네일|140px|왼쪽|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가난한 숙부들이 돌보지 못해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쪽 참조.</ref>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굶주린 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ref name="크리스"/>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규식을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언더우드를 말렸다.<ref name="크리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ref name="크리스"/>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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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와 방황 ====
[[파일:Kim Kyusik, Underwood school in 1888.jpg|섬네일|200px|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영어]]와 수학, [[라틴어|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9>[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36 경신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기독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김용원)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군|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ref name="do265"/>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ref name="do265"/>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f name="do265"/>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ref name="do265"/> [[이정식]]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ref name="do265"/>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좌우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ref name="do265">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ref>'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 청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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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독립신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ref name="크리스"/>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개신교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ref name="크리스"/>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부|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ref name="크리스"/>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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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ref>《8.15의 기억》,한길사. p420</ref>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ref name="dl253">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ref> 그곳에서는 조선에서와 달리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노동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ref name="dl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