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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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kyu11.gif|섬네일|오른쪽|180px|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 (조선)|김지성]](김용원)은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 =====
[[파일:조선 최초의 유아세례자.png|섬네일|140px|왼쪽|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가난한 숙부들이 돌보지 못해 병약한데다가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ref name="크리스"/>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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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와 방황 ====
[[파일:Kim Kyusik, Underwood school in 1888.jpg|섬네일|200px|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9>[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36 경신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f name="do265"/>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ref name="do265"/> [[이정식]]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ref name="do265"/>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 청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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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독립신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ref name="크리스"/>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개신교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ref name="크리스"/>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부|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ref name="크리스"/>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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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ref>《8.15의 기억》,한길사. p420</ref>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ref name="dl253">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ref> 그곳에서는 조선에서와 달리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노동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ref name="dl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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