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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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년]]에 건국된 [[수나라|수(隋)]]가 중국을 통일하자 위기를 느낀 고구려는 왜국과의 강화를 모색하면서 승려 [[혜자]]를 왜국에 파견하는 관계 개선에 나섰고, 한편 [[양견|문제]]・[[양제]]의 치세에 4번에 걸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세력이 약화된 [[수나라|수(隋)]]는 [[618년]]에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당(唐)]]이 628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당 태종]]・[[당 고종]]은 고구려를 644년~648년에 걸쳐 공략했지만 실패하였다.
627년
하지만 백제와 왜국을 갈라 놓으려는 신라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친신라보다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해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당과 남부여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ref>당시 왜의 외교 정책은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다는 설과, 고토쿠 천황 중심의 친백제 세력과 나카노오에 황자 중심의 친신라 세력로 나뉘어 있었다는 설, 거꾸로 고토쿠 천황이 친신라 세력이었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친백제였다는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ref> 또한 신라의 급속한 발전이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세련된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五|卷第廿五 孝德天皇]] |인용문=二年春三月...是歲、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着唐國服、泊于筑紫。朝庭惡恣移俗、訶嘖追還。于時、巨勢大臣、奏請之曰、方今不伐新羅、於後必當有悔。其伐之狀、不須舉力。}}</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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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백제 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왜의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정치에 반영하여 중앙집권화에 이용하려 했는데, 덴지 천황 때에 책정된 오오미령(近江令)부터 덴무 천황 때에는 왜국 최초의 율령법으로 여겨지는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의 제정이 이루어지면서 율령국가의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이호 율령]]([[701년]])의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의 건설은 일단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왜국 내부의 위기감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일본이라는 율령국가 수립의 한 토대가 된 것이다.
또한 한민족의 새로운 단일 국가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정복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문무대왕]]과 함께 신라의 명장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조공을
[[파일:Kwisil Shrine.jpg|섬네일|200px|오른쪽|귀실집사를 제사지내는 기시쓰 신사.]]한편 왜로 망명한 백제 유민들은 왜국에서 신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부여풍의 동생 선광(善光, 또는 禪廣)은
귀실집사는 [[오미 국|오미 국(近江國)]](지금의 일본 [[시가현]])의 간자키(神前)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다가 [[669년]] 왜 조정에 의해 여자신 집단과 함께 약 700명의 백제 유민들이 황무지였던 가모노고오리(蒲生郡)에 이주되었다고 한다.
== 이설·속설 ==
7세기까지 규슈 북부에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왕조가 있었다는 후루타 타케히코(古田武彦) 등의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說)에 따르면,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운 왜의 정체는 사실 기나이 정권이 아니라 다자이후(大宰府)를 수도로 삼고 있던 규슈 왕조의 군사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사료 비판과 같은 역사학의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지 않은 학설이라며 "학설로서 비판이나 검증을 받을 가치도 못 된다" 하여 무시되고 있다. 일본의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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