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전쟁 고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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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들은 전쟁의 위협이 있던 [[한반도]]에 비해 비교적 안전했던 동구권에서 보호받으며, 동행한 한국인 교사들과 현지의 교사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적응이 어려워 '한국 아이들끼리 채소를 길러다 [[김치]]를 해먹었다'는 회고가 있으나, 언어를 배우는 등 동구권에 적응한 이후에는 현지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받고, 놀이를 하는 등 평범한 학생으로의 일상을 보냈다. 현지로 파견된 북조선의 교사와 현지의 교사가 결혼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동구권에 위탁되었던 고아 등은 현지 생활에 크게 적응하게 되었다.<ref name = "B"/>
하지만 1950년대 중반 [[헝가리]]에서 [[헝가리 혁명]]이 벌어지는 등 민주화 바람이 불었고, [[1956년]] [[김일성]]이 동구권에 순방을 나가 전쟁 고아를 만났던 기간 북조선 내부의 연안파와 소련파 등이 주도해 [[8월 종파 사건]]으로 김일성을 실각하려는 시도가 벌어져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한, 북조선의 유학생들 중 일부가 북한에서 망명하려는 시도가 적발되어 유학생 전원을 귀국조치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다.<ref name = "D">{{뉴스 인용|성1=김|이름1=종성 |제목=6.25 전쟁고아들 유럽으로 보낸 북한, 김일성의 큰 그림 |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81596 |날짜=2018-10-24 |확인날짜=2020-07-26 |뉴스=오마이스타}}</ref> 이에 따라 [[1956년]]부터 순차적으로 동구권을 비롯해 [[몽골]]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던 전쟁 고아들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해당 아동들이 고국에 귀국한 후에는 편지 등이 전달되었으나, 당국의 검열 등으로 인해 [[1961년]] 이후로는 서신의 전달이 차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북한인과 결혼했던 동구권 사람들의 경우 북한 내에 팽배하기 시작했던 [[제노포비아]]를 견디지 못하거나, 북조선 당국의 강제추방으로 인해 가족과 생이별을 하기도 했다.<ref name = "C"/>
전쟁 고아였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어학 능력 등을 인정받아 북조선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위탁교육을 받은 국가로 발령이 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홍의표는 주[[폴란드]] 북한 대사관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고, 한경식 역시 [[폴란드]]대사관의 무관에 올라 두 국가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ref name = "D"/>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자국 전쟁 고아가 동구권으로 위탁 교육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위탁 교육을 받았던 아동들의 현황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뉴스 인용|성1=채|이름1=유나 |제목=[통일로 미래로] 동유럽으로 간 北 ‘전쟁 고아’ |url=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01722&ref=A |날짜=2020-03-14 |확인날짜=2020-07-26 |뉴스=한국방송}}</ref>
== 대중 문화에서의 한국 전쟁 고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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