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안토니우 (포르투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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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투 수도원장(prior do Crato, priory of Crato) 안토니우(António de Portugal, 1531~1595.8.26)는 포르투갈(Portugal) 국왕 [[마누엘1세마누엘 1세]](Manuel I)의 손자이자 1580년 포르투갈-스페인 합병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왕위요구자(claimant of the Portuguese throne)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1580년 33일동안 왕위에 있었던 그를 포르투갈 국왕 안토니우1세(António I)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2세]](Felipe II, Philip II)가 포르투갈 국왕 '필리프1세(Filipe I)’로 재위하였고, 안토니우는 1583년까지 왕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복자 바르톨로메우(Frei Bartolomeu dos Mártires, Bartholomew of Braga)의 제자이기도 하다. 별명은 단호한 사람(The Determined), 투사(The Fighter), 독립운동가(The Independentist)이다.
 
== 초기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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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왕위 계승 분쟁 ==
안토니우가 모로코에서 포로로 있는 동안, 외삼촌 에보라 추기경(the cardinal archbishop of Évora) 엔히크(Henrique, 재위 1578.8.4.-1580.1.31)가 포르투갈 국왕 [[주앙3세]](João III, 재위 1521-1557)의 형제 중에 유일한 생존자로서 새 국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엔히크는 나이가 많고 왕위에서 왕위계승 정통성이 있는 마지막 남성이었다. 1580년 1월, 포르투갈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결정된 알메이림(Almeirim)에서 포르투갈 조정이 세워졌으나, 엔히크는 후계자 지정도 하지 않고 사망하였고, 다섯 명으로 구성된 군사정부(governing junta)에 의해 섭정이 임명되었다. 이때 왕위계승자였던 브라간자 여공(Duquesa de Bragança, Duchess of Braganza) 도나 카타리나(Dona Catarina),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2세(Felipe II), 그리고 안토니우가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여성이었고 안토니우는 사생아 출신이었으며 펠리페2세는 포르투갈인이 아니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카타리나는 사후 자신의 직계후손인 [[주앙4세]](João IV)가 1640년 포르투갈 국왕이 되어서야 합법적 계승자로 판정되었으나, 1580년 당시에는 여러 왕위계승자 중 한 명에 불과하였다. 당시 유럽 봉건군주들의 장자상속제(primogeniture) 관습에 따라서, 정통성 있는 왕위계승자는 국왕 사망 직후에 생존한 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마누엘1세와마누엘 1세와 그의 아들 주앙3세로 이어지던 왕계는 손자 세바스티앙이 모로코에서 사망하면서 끊겨버리면서, 마누엘1세의마누엘 1세의 다음 아들 루이스 대공이 합법적 계승자가 되었다. 루이스 대공이 사망하면서 아들 안토니우는 새로운 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 비록 태생이 사생아인 것이 흠이었으나, 1385년 페드루1세(Pedro I)와 정부(情婦) 테레사 로렌수(Teresa Lourenço)와의 사이에서 낳은 주앙(João)이 포르투갈 국왕 주앙1세(João I)로 임명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의 적들은 안토니우가 사생아라는 이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내세웠다.
 
펠리페2세의 모친이 포르투갈인이지만 포르투갈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에스파냐 출신 통치자에 대한 적대심을 이용하여, 안토니우는 자신을 펠리페2세를 대체할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안토니우는 자신이 태어난 이후에 부모인 루이스 대공과 비올란테 고메스가 결혼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결혼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둘의 결혼 여부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안토니우의 주장은 귀족(noble)이나 신사(gentry) 계층에게 지지받지 못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펠리페2세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향후의 이익을 보장받거나 토지와 특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의 지지자 대부분이 안토니우 데 시에나(António di Siena, Anthony of Sienna)와 같은 하위 성직자나 소작농, 기능공들로 구성되었다. 펠리페2세는 포르투갈 상위 계급들에게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온 금들을 뇌물로 제공하여, 자신의 포르투갈 왕위계승 주장을 강화하였다. 포르투갈 귀족과 부유층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위의 연합은 포르투갈 경제에 이로울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경제는 저하되었다. 합병이 있었음에도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유럽과 에스파냐 제국 내에서는 자치 행정과 독립 지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