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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夫餘, [[기원전 2세기]] ~ [[494년]])는 한민족의 고대국가인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창춘)|위수]], [[눙안현]],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194년에 멸망으로멸망한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東夫餘)」, 그리고 [[추모왕고주몽]]([[주몽]]高朱蒙)이 세운 「[[졸본부여고구려]](卒本夫餘高句麗)」 알려져부여족이 세운 있다나라이다.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고리국]]에서 나온 [[동명왕]]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까지 700년 이상 존속한 [[예맥]]계 [[부여족]](夫餘族)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 성]],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고리국]]에서 나온 동명왕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까지 700년 이상 존속한 [[예맥]]계 [[부여족]](夫餘族)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 성]],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以殷正月祭天”(은나라 정월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ref> 궁궐{{.cw}}성책{{.cw}}창고{{.cw}}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有宮室、倉庫、牢獄。”(궁궐, 창고, 감옥이 있다.)</ref>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cw}}우가(牛加){{.cw}}저가(猪加){{.cw}}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cw}}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cw}}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모두 여섯 종류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가 있다. 마을(邑落)에는 우두머리(豪民)가 있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下戶)은 모두 머슴(奴僕)이라고 부른다.)</ref>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뭇 우두머리들은 각자(別) 곳곳에서(四出) 우두머리를 맡는다. 큰 구역(道大)을 맡은 이는 수천 집을 다스리고 작은 구역을 맡은 이는 수백 집을 다스린다.)</ref>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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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본부여 ===
{{본문|고구려}}
*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도읍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도읍지를 졸본이라 칭하고 졸본부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인 것처럼 기록하고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졸본부여의 왕이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이설을 적어두고 있다. 〈백제본기〉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아예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비류설]]을 언급하면서, 졸본 지방의 유력자 [[연타취발]]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집안의 세력과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 지방의 다른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설화중 첫번째 설화만 정설로 인정 받는다.
* 졸본(Zolbon)은 인도유럽어로 촐폰(Chopon)으로 표기, 발성된다. 인도유럽어는 경음화가 이루어 짐에 자음 ㅂ이 ㅍ으로, ㅈ이 ㅊ으로, ㄷ이 ㅌ으로 발성된다. 이러한 이론은 비교언어학의 정설이다. 이 촐본은 키르기즈스탄의 이식쿨 호수 옆의 도시인 촐폰아타(Choponata)의 지명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 회복을 위하는 '다물사상'에 의하여 건국한 것으로 원래 졸본 부여의 땅은 연타발(소서노의 아버지)족장의 땅이었다.
* 재야사학자인 정진만의 '21세기에 새로 조명하는 고대사 1권'에서 설명하고 있는데(ISBN 978-89-6798-049-8, 수서원). 이러한 주장은 부여가 만주권에서 형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가섭원 부여' 의 위치에서 다시 한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 보아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거나 고구려의 별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졸본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이전에 많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가 부여계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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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여 ===
* [[백제]](百濟)는 [[백제 성왕|성왕]] 시기에 '남부여(南扶餘)'로 일시적으로 국호를 변경하기도 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946&content_id=rp070309460001&search_left_menu=5 문화콘텐츠닷컴]</ref> 이 국호나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 계승 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 두막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