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루차돌이 (토론 | 기여)
잔글 →‎발해(渤海): 천통이라는 연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한시대의 유물이 평안도에서는 전무하므로 평안도는 위만조선이나 낙랑군의 땅이 아니었다.
1번째 줄:
'''평안도'''(平安道, 또다른 이름은 [[관서 지방]])는 조선의 [[팔도]] 가운데 하나에 속했다. 평안도는 한반도 북서부에 위치해 있고, 중심지는 [[평양직할시|평양]]이다.
 
== 조선고조선(朝鮮)시대와 낙랑군그 직후 ==
 
평안도는 후기 [[고조선|고조선]](古朝鮮)의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로서, 철기문화가 발달했으며, 대동강 양안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한반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평안도에서는 전한시대의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안도는 고조선의 분열 이후 [http://ko.wikipedia.org/wiki/위만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아닌 다른 고대 한국 왕국의 영토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다. 즉 한사군은 요하유역에 있었으며 평안도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http://ko.wikipedia.org/wiki/후한_광무제 후한 광무제](光武帝)이후 중국의 부단한 공격으로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는 데, 이 때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한 땅에 [http://ko.wikipedia.org/wiki/낙랑국 낙랑국]이 세워지게 된다.
평안도는 후기 [[고조선|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으로, 철기문화가 발달하고 [[진국|진(辰)]]과 [[한나라|한국(漢國)]] 사이에서의 중계 무역이 번창하였으며, 대동강 양안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한반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감행하였고, 조선이 패망하게 되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게 된다. 사군현 중에 하나인 [[낙랑군|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어 약 400년간 [[중국]] 왕조의 치하에 있게 된다.
 
== 고구려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
 
이후에 [[고구려]] [[미천왕]]이 [[312년]]에 낙랑군을낙랑국을 폐지하면서멸망시키면서 평안도는 고구려의 직속 영토가 되었다. [[평양직할시|평양성]]이 잠시 [[백제]]의 [[근초고왕|근초고대왕]]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으나, 곧 고구려의 영토로 환수되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영락태왕]]이 남정(南征)할 때에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장수왕|장수태왕]] 15년([[427년]])에 태왕이 국도(國都)를 [[국내성|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추후 241년간 고구려의 심장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68년]]에 [[신라|나]][[당나라|당]](羅唐)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가 허망하게 무너지면서 황도(皇都)로서의 역할을 잠정 중단되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통치하는 기구인 [[안동도호부]]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나당전쟁]]의 지휘 기구가 된다. 그런데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하게 되면서,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 지역은 무주(無主)의 공백 지역이 된다.
52번째 줄:
 
* [http://kr.100.yahoo.com/result.html?pk=19636500 야후 백과사전 평안도 소개]
* [http://knol.google.com/k/byeongju-park/gojoseon/2zvfgrgyend5c/5# Gojoseon: 평안도에서는 전한시대의 유물이 없고 오직 후한시대의 유물만 출토되었다.]
 
[[분류:한국의 행정 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