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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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년]]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 개국후(晋康郡 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개경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개경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덕창공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도|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참고로 '고려왕조사' 등을 저술한 고려사학자인 류재하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약목유(柳)씨(곧, 문화柳씨 곤산군파)가 이 희종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성 왕씨 족보인 성원록에 보면, 희종의 손자인 광평공 혜의 자손이 [[유씨]](柳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약목유씨(문화柳씨 곤산군파)가 이 후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