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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한 1594년(선조 27년) 1월 22일부터 옥중에서 사망한 1596년 8월 21일까지의 2년 7개월간으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였다.<ref name='slwk' /> 김덕령이 처가가 있던 담양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간 까닭은 진주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 안에 있던 군관민(軍官民) 5만여 명이 옥쇄(玉碎)하였다. 이에 전라도의 의병을 경상도 진주로 보내어 경상도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진작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비변사에서는 의병 대장 김덕령에게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가서 주둔하게 하였다.<ref name='slwk' /> 또한 나이 28세의 김덕령은 전국 의병 5천여 명을 거느리는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의 방어 책임을 맡았다. 이후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투 상황도 거의 종결되었고,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비변사에서는 김덕령에게 의병 숫자를 줄이도록 명하였다. 또 후퇴하는 왜군과 되도록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무익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명하였다.<ref name='slwk' />
한편 실제적인 전공은 극히 드물다.
1611년 현종 대에 김덕령을 신원할 때도 그 평가에서 전공을 거론하지 않고, 큰 절조를 지니고 용기와 힘을 지녔으며 위엄의 명성을 널리 떨쳤다고 밝힌다.<ref name='kra_10208030_005' /><ref name='krb_10208030_006' /> 이는 원경하의 상소에서도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호남의 10대 인물로 꼽고 있을 뿐, 임진란 때의 전공을 거론하지는 않았다.<ref name='kua_12310002_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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