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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장문포(長門浦)의 세 차례나 수륙합동작을 펼치며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견고하게 쌓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1,6km나 되는 거리에 뗏목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았고, 또한 “일본이 명나라와 더불어 지금 화친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니 싸울 필요가 없다.”라는 패문을 써서 땅에 꽂고는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고,<ref name='slwk' /><ref>《[[고대일록]]》권2. </ref> 결국 [[음력 10월 7일|10월 7일]] 충청병사 선거이와 조방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이 육지의 주둔지로 돌아갔다.<ref name='h382557' />
 
이렇게 장문포 전투에서 수륙합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refn | group="주" | [[1594년]] 9월과 10월에 치른 전투로만 볼 때 [[장문포 해전]]은 패배이다. 윤두수는 이 전투의 패배와 보고 미비의 책임을 지고 체직되었다. 다만 그 뒤로도 조선군과 일본군이 대치를 계속하였고, [[음력 11월 17일|11월 17일]](양력 12월 28일) 일본군이 강화교섭을 핑계로 후퇴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장문포 해전은 승전이다. }}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도 조정과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더욱이 좌상 윤두수에게 잘못 보여 훗날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ref name='h382067' /><ref name='h383035' />

그러나 선조는 자신이 허락하여 치른 전투였음을 감안하여 윤두수를 감싼다.<ref name='h382067' /><ref name='h383035' /> 다시 말해 장문포 전투에 대한 장계 문제로 논란이 생기고, 선조가 윤두수를 감싼다감쌌으나 결국 체직한다.<ref name='h383035' />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음력 11월 19일|11월 19일]]에 보낸 장계가 조정을 발칵 뒤집는다. 이 장계에는 전라주사(全羅舟師)의 사후선(伺侯船) 3척이 실종되고,{{refn | group="주" | 《난중일기》 [[음력 10월 1일|10월 1일]]자에 같은 내용이 있다. }}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거의 다 죽은 사실이 적혀 있었다. 10월 1일과 3일의 일부 경과를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도리어 공훈을 보고하였다면서, 사헌부는 [[음력 11월 22일|11월 22일]]에 권율·이순신을 잡아들여 신문하고 윤두수를 파직하라고 주청한다. 12월 1일까지 여러 차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돌아가며 상소가 올라왔고, 결국 선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장수를 바꾸는 일은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일이라서 권율·이순신은 체직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16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 윤두수만 체직시키고 이 사건을 마무리 한다. 즉, 장문포 해전은 (원균이 처음 입안하고) 윤두수가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고 총책임자가 되었으며, 야전에서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이 전투지휘를 하는 전투였다. 윤두수는 이 전투의 패배와 보고 미비의 책임을 지고 체직되었으나, 야전 지휘를 했던 권율과 이순신은 전장의 장수라는 이유로 체직되지 않았다.<ref name='h383035' />
 
한편, [[1594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ref name='knb_12709001_0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709001_001 선조수정실록 28권, 선조 27년 9월 1일 병자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체찰사 윤두수가 거제의 왜적을 이기지 못하자 양사가 탄핵하여 파직시키다] </ref>에도 “김덕령은 신용(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알았는데, 한 차례 전투에 공이 없자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음력 10월 14일|10월 14일]]자 《선조실록》에서, 심지어 영의정 유성룡은 “김덕령이 병이 있다고 하는데, 일이 성공되지 못할 줄 알고 병을 핑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혹평한다.<ref name='h383035' /> 도리어 선조가 “덕령이 만일 일이 성공되지 못할 줄 알았다면 의당 대장(大將)에게 힘써 말하여 중지시켰어야 한다. 듣자니 ‘여러 장수들은 덕령이 오지 않자 지팡이 잃은 맹인과도 같았다.’고 하는데, 여러 장관(將官)이 덕령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낙심을 한단 말인가. 당초 거사할 때 나도 반드시 패할 줄을 알기는 하였으나 적을 토벌하려는 마음은 매우 취할 만하다. 비변사에서는 과히 책망하지 말고 별도로 뒷 일을 잘 수습할 수 있는 계책을 하도록 하라.”라고 두둔한다.<ref name='kna_12710014_006'>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0014_006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4일 무오 6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영의정 유성룡 등과 전황, 동서인의 다툼, 조세견감, 군역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