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해릉양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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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 [[금 세종|세종]](世宗)
 
|휘 = 한풍 이름은 완안 량(完顔亮)<br />여진 이름은 완안 적고내(完顔迪古乃)
|휘 =
|별호 =
|연호 = [[천덕 (금)|천덕]](天德) [[1149년]] ~ [[1153년]]<br />[[정원 (금)|정원]](貞元) [[1153년]] ~ [[1156년]]<br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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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
'''해릉양왕 완안량'''(海陵煬王 完顔亮, [[천보 (금)|천보]](天輔) 6년 [[음력 1월 16일|1월 16일]]([[1122년]] [[2월 24일]]) ~ [[대정 (금)|대정]](大定) 원년 [[음력 11월 27일|11월 27일]]([[1161년]] [[12월 15일]]))은 금나라 제4대 황제(재위 : [[1149년]] ~ [[1161년]])였으나 폐위당해 해릉왕으로 강등된 사람이다.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해릉왕이라고 하면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금 태조]] 아구타의 서장자인 요왕 종간(遼王 宗幹)의 차남이며, 자는 원공(元功), 여진 이름은 디구나이(迪古乃), 즉위 전 작위는 해릉왕이다. 해릉왕으로서 시호는 '''양'''(煬)이고, 연호는 '''천덕'''(天德)이며, 어머니는 발해의 왕손인 대씨(大氏), 황후는 여진 귀족의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인 도단황후(徒單皇后)다. 열렬한 중국문화 애호가였으며, 중국인을 중용하여 국가기구의 중국화와 황제권의 독재화를 도모하였다. 남송(南宋) 평정을 꾀해 남벌군을 일으켜 출병하였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반란군에게 시해당하고서 폐위되었다. 금나라 역사상 폐제(廢帝) [[위소왕]]과 함께 폐위된 황제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