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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률]]은 역모 일당 중 [[경종]]이 [[청주성]] 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그를 죽이면 [[매곡성]]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는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건은 현률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 (고려)|염상]]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염상 (고려)|염상]]은 형벌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되며 예외를 두면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염상 (고려)|염상]]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 (고려)|염상]]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처형한다.참형에 왕건이 이때 현율의 말을 듣지 않고 염상의 말을 들은 결과 매곡성의 [[공직]]은 견훤에게로 투항하고, 매곡성 인근 지역들도 상실하게 되는 큰 피해를 얻게 된다처한다.
 
왕건은 또 다른 정적인 [[공주]] 출신 [[이흔암]]을 제거한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 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 곳 성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 또한 그를 매우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았다. 궁예 시절 자신과 같은 지위의 장수였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강한 인물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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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개성]]에 위치한 [[현릉 (고려 태조)|현릉]](顯陵)이다. [[신혜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 비판 ====
 
재위 기간 중의 정치적 역량은 매우 뛰어났지만, 집권 기간 동안 호족 세력 통제에 완전하지 못했고, 후계 구도를 제대로 잡지 못해 그의 사후 고려 초기의 정치 혼란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대 혜종의 권력 기반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해 그의 사후 정종의 쿠데타와 광종의 대량 숙청이 일어나 고려 초기 사회가 혼란해진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그도 생전에 여러 호족 통제 정책들을 시행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또 자신의 사후 후계 문제를 우려해 박술희와 왕규,염상,박수문 등을 혜종의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혜종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믿고 그에게 보위를 넘겨 주었지만, 더 치밀하지 못해 그의 사후 고려는 한동안 반란들과 숙청으로 혼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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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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