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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 (이름)|자]]는 '''계'''(季)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ref>정(亭)이란 당시 일정 거리마다 배치되어 있었던 역소의 일종을 가리킨다.</ref>으로 있다가 [[진나라]]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 [[항우]]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ref>원래 유방은 고제(高帝)라고 불러야 올바르지만, [[사마천]]이 [[사기 (역사서)|사기]]에서 '고조'라고 칭한 이래 이 호칭이 주지됐다.</ref>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참조|한비자}}
[[항우]]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한나라|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ref>원래 유방은 고제(高帝)라고 불러야 올바르지만, [[사마천]]이 [[사기 (역사서)|사기]]에서 '고조'라고 칭한 이래 이 호칭이 주지됐다.</ref>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 생애 ==
한번은 선보(單父, 산동 성) 사람인 [[여선왕|여공]](呂公)이 자신의 원수를 피해서 유방이 있는 패로 왔는데 당대 명사였던 여공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고 소하가 이 연회를 관리하게 되었다. 패의 사람들이 각각 선물과 돈을 갖고 모였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모여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 되자 소하는 가지고 온 선물이 1천 전(錢) 이하인 사람은 땅에 앉도록 했다. 이에 유방이 와서 자신은 전 1만 전의 선물을 가져왔다며 여공에게 전했고 여공이 놀라 문까지 나아가 유방을 맞이하고 상석에 앉혔지만, 유방이 그런 돈이 없는 형편을 잘 알았던 소하는 "유방은 원래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큰소리나 칠 줄 알았지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그러니 진심으로 대하지 말라)"라고 여공에게 전했지만, 여공은 유방을 환대하면서 그 관상을 보고 자신의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이가 바로 [[고황후|여치]]이다.{{출처|날짜=2013-06-16}}
 
아내를 맞은 뒤에도 유방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고 [[고황후|여치]]는여치는 친가에서 1남 1녀의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 어느 날 여치가 논에서 김매는데 지나가던 한 노인이 여치의 인상과 그 여자의 아들(후일 한 혜제)과 딸(후일 노원공주)의 고귀한 얼굴을 보고서 놀랐다. 돌아온 유방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노인에게 관상을 보게 했더니 노인은 "당신이 있어서 부인과 아이들의 인상이 고귀합니다. 당신의 고귀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일러주었고 유방은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이 밖에도 유방이 천하를 잡을 것을 암시한 몇 가지의 일화를 수록하는데 이 중 유방을 붉은 용의 자식이라고 전한 일화는 한이 화덕(火德)으로 일어났다고 칭한 것과도 연결된다.
 
=== 농민 봉기 ===
 
요관(嶢關)은 진의 마지막 요새로서 죽음을 각오한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이에 장량은 군사인 수비대장이 상인 출신으로 타산적인 인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수많은 기치를 세우고 대병력이 온 듯이 꾸미는 계책으로 항복을 받아낸다. 유방의 군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불시에 수비대를 공격해 제압하고 요관마저 차지했다[대장이 항복해도 결사한 관문의 병사들은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장량은 이미 간파한 것이다]. 이렇게 유방은 관문에 입성했고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패상(覇上)까지 진군한 유방 앞에 진 왕 자영(子嬰)이 목에 끈을 묶고 백의 차림으로 나타나서 황제의 옥새를 바치면서 항복한다. 부하들은 자영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유방은 이를 듣지 않고 자영의 목숨을 보증했다.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궁 내의 여자와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오래 머물며 즐기고 싶었지만 번쾌나 장량의 간언으로 패상으로 물러났다. 시골 한량이었던 유방에게 함양의 재보와 후궁의 여자들은 극락으로까지 여겨졌지만, 부하의 충고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유방의 도량과 부하를 향한 신뢰는 항우와 상이해 대비되며, 그 후 천하통일에도 매우 크게 작용한다. 덧붙여 이때 소하는 함양에 입성하자 마자 진나라의 승상부과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들을 챙겨두었는데 이 정보들은 후일 초한전쟁과 한 왕조의 법률 제정과 지방 통치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소상국세가|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참조|유가증권}}
덧붙여 이때 소하는 함양에 입성하자 마자 진나라의 승상부과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들을 챙겨두었는데 이 정보들은 후일 초한전쟁과 한 왕조의 법률 제정과 지방 통치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소상국세가|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 한왕에 책봉 ====
그 무렵 항우는 동부에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어떤 사람의 "당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왔지만, 항우가 오면, 그 공적을 가로채리라. 관중을 봉쇄하면, 당신이 그대로 관중의 왕이다"라는 진언을 듣고 관중의 동부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병사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 유방이 관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최대의 요인은 어려운 상대인 진의 주력군을 대부분 항우가 맡았던 사정에 있었는데도 이미 관중 왕인 듯이 행세하면서 함곡관을 닫아버린 행위에 격노한 항우는 [[영포]](英布)를 시켜 이를 쳐부수게 했다. 함곡관에 들어온 항우는 40만 군세를 몰아 유방을 멸하려고 했고(여기에는 참모 범증의 진언도 있었다), 유방의 부하인 조무상(曹無傷)도 이에 영합하느라 "패공은 관중의 왕위를 노리고 진왕 자영을 재상으로 하여 관중의 보물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고 중상모략하며 항우의 분노를 부채질하기에 이르렀다. 병력도 용맹도 유방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던 항우와 맞서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때마침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유방군의 진중에 있었다. 일찍이 장량에게 은혜받은 일이 있었던 항백은 장량에게 보은하고자 항우의 공격을 앞둔 유방군 진영에서 장량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지 않겠다며 거절하면서 항백을 유방에 소개시키고 어떻게든 항우에게 항변해야 한다며 간절히 부탁했다. 항백의 중개로 유방은 항우가 주재한 홍문(鴻門)에서 변명하고자 참석하여 목숨을 수차 위협받았으나 장량이나 번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홍문의 회]]). 진중으로 돌아온 유방은 변절자 조무상을 죽이고 그 목을 군문에 내걸었다.
 
그 후 항우는 함양에 들어와 항복한 자영을 위시해 진의 왕족이며 관리 4천 명을 몰살시키고 진의 모든 보물을 거두어 돌아오면서 [[아방궁]]을 비롯해 진의 화려한 궁전을 다 태워 버렸으며,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된 여러 보물을 훔친 행동은 유방의 관대한 행동과 대비되어 관중 백성의 민심이 항우에게서 유방에게로 기우는 한 요인이 된다. 나아가 팽성으로 돌아온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하면서 이름뿐인 왕이었던 회왕을 '의제'로 높여서 변경으로 보냈다가 길에서 죽였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제후들에게 [[진나라]] 이전의 [[봉건제]]를봉건제를 실시한다. 공적보다는 항우와의 친소(親疏)관계를 기준으로 성립했던 이 봉건제는 제후들의 원성을 샀고 봉건제 시행 직후에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유방에게도 약속된 관중 땅이 아닌 그 서부의 한 지방으로 당시로서 벽지이자 변경에 불과했던[통일 이전에 진 영토이기도 했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 중국 [[사천 성]]의 옛 호칭)이 주어졌는데 '좌측[서부]으로 옮긴다'고 한 데서 후일 '좌천(左遷)'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단, 당시 '관중'이란 단순히 '관중 분지'만을 가리키는 때와 '통일 이전 진의 영토' 전역을 가리키는 용법이 있었고 양방 모두 용법이 병용됐다. 즉 후자를 좇으면, '관중을 준다'고 했던 약속은 지켜졌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유방이 동부로 진입을 방어하고자 관중은 장한, [[사마흔]], [[동예]] 등 구 진의 장군 삼 명에게 분배된다. 당시 한중은 유배지로 여겨질 정도로 변경이었다. '촉의 벼랑길'이라 불리는, 사람 일 명이 겨우 통과할 길 말고는 한중으로 통하는 어떤 길도 없었고 유방이 데리고 있던 병사 3만 명은 도중에 대부분이 도망쳐서 남은 병사들도 동부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 초한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