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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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후백제는 [[신라]]가 쓰던 관직명을 거의 대부분 사용하였다. 후백제의 관리였던 [[능환]]은 신라 관계의 6등위인 아찬(阿飡) 벼슬을 지냈던 것과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 역시 신라 제 7관등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아 후백제는 신라와 매우 흡사한 사회 구조와 관직 체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외교 ==
 
=== 중국과의 관계 ===
 
==== 대중국 외교정책 ====
견훤은 900년에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를 세운 다음, 오월(吳越, 907~978)과의 사신왕래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오월은 [[오대 십국 시대]] 강소성·절강성을 중심으로 번영한 나라로 중국 최대 청자 생산지인 월요(越窯)가 위치한 곳이다. 또한 중국 남해교역의 종점이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후백제에게는 대중국 해상교역에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후백제는 오월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굳건히 했고 외교적인 교섭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후견세력을 확보했다. <ref>{{웹 인용|url=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2141846609536528&mediaCodeNo=257|제목=후백제 견훤, 중국의 어떤 나라와 국교를 맺었나|날짜=2015-10-25|언어=ko|확인날짜=2020-08-16}}</ref>
 
==== 지중파 인재 ====
후백제의 대신인 [[최승우]]는 대표적인 중국 유학파이다. [[890년]] [[당나라|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였다. 이후 [[893년]]에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나라|당]]의 관직을 지냈고, 문인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 외교의 위기 ===
[[태봉]]국에게 나주를 빼앗기면서 후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무역로이자 교역로가 될 항구를 잃게 된다. 이는 곧 후백제의 외교력 상실로 이어져 후백제의 장래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후백제는 멸망한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