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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신라 상대|상대]], [[신라 중대|중대]], [[신라 하대|하대]]로 나누었다.
* [[신라 상대|상대]](上代:1대 시조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 ∼ 28대 [[진덕여왕]], [[기원전 57년]]∼[[654년|서기 645년]], 28대 약 730년간)는 성골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건국 이후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과 함께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시기이다. 상대(上代)는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관통하며, 이때는 신라 문화의 황금기로 해외의 여러 국가들과 교역한 시기이도 하다.
* [[신리 중대|중대]](中代:29대 [[신라 태종 무열왕|태종 무열왕]]∼36대 [[신라 혜공왕|혜공왕]], [[654년]]∼[[780년]], 8대 130년간)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진골 왕통이 시작되는 시대로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삼국을 [[신라의 삼국통일|통일]]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왕조(統一王朝)가 확립되어, 신라가 경제·문화에서 극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 [[신라 하대|하대]](下代:37대 [[신라 선덕왕|선덕왕]]∼56대 [[신라 경순왕|경순왕]], [[780년]]∼[[935년]], 20대 약 160년간)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이 등장으로 신라가 약해지던 시기이다.
 
==== 삼국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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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
[[파일:9주 5소경.png|섬네일|왼쪽|250px|9주 5소경]]
[[통일신라|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ref><한국의 전통예술> (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편집부 저 ) 304p</ref>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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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서 고려로 ===
호족 출신이자 신라의 장군이었던 [[고려 태조]]는 [[고려후고구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하였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면 그 [[종실]]은 엎어지고 그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ref>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논</ref>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ref>[http://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00602/28785354/1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ref>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ref>[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7/02/75397/ 신라 경순왕, 나라를 버려 나라를 얻다] 매일경제 [[2017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