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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이 문서는 1392년에 [[조선 태조|이성계]]가 세운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기원전에 단군이 세운 고대 국가에 대해서는 [[고조선]] 문서를, 1897년 이후의 조선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문서를, 그 밖에 다른 뜻에 대해서는 [[조선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요약 필요|날짜=2020-06-25}}
{{조선 표}}
{{다른 뜻 넘어옴|북한|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북한 (십국)}}
'''대조선국'''(大朝鮮國),<ref name='kza_11312017_002'> {{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1312017_002|제목=고종실록|성=|이름=|날짜=1876년(조선 개국(開國) 485년; 고종 13년) 12월 17일(음력 10월 27일)|권=13권|출판사=|장=부산항 조계 조약을 체결하다|확인날짜=2020-07-18|인용문=竝錄副以地圖, 互鈐印以防他日之紛拏如是。<ins>大朝鮮國</ins>丙子年十二月十七日。東萊府伯洪祐昌印。大日本國 明治十年一月三十日。管理官近藤眞鋤印。}} </ref> 또는 '''조선'''<ref name='kaa_10202015_001'> {{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3년(태조 2) 음력 2월 15일|권=3권|출판사=|장=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예부의 자문|확인날짜=2020-07-19|인용문=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ins>조선(朝鮮)</ins>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ref>(朝鮮, {{중세 국어|됴ᇢ〯션〮}} 또는 {{중세 국어2|됴ᇢ〯션〯}}<ref> 《[[동국정운]]》 권3([https://www.yeoju.go.kr//jnrepo/synap/jnBrdBoard/202007/712ab3f99ed7429d95f4930ac8433498_1593743317195.pdf.htm 션 - pdf파일 12~13쪽]), 권4([https://www.yeoju.go.kr//jnrepo/synap/jnBrdBoard/201701/415a1b121e454a76978de32411f75e9d_1485224609670.pdf.htm 됴 - pdf파일 10쪽]) 참조. </ref> <small>[[근대 한국어]]</small>: {{중세 국어2|조션/죠션/됴션}}<ref name='ws-독립신문'> {{ws |"[[s:독립신문/1896년/4월/7일|《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자 (창간호)]]"}} 제1면에서 나타난 세 가지 표기입니다. </ref>, {{문화어|조선봉건왕조(朝鮮封建王朝)<ref> {{웹 인용|url=http://www.naenara.com.kp/ko/history/period.php|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701053405/http://www.naenara.com.kp/ko/history/period.php|title=조선력사 시대구분표|archivedate=2019-07-01|website=[[내나라 (웹사이트)|내나라]]|access-date=2019-07-01}} </ref>, 리왕조 (李王朝)<ref> {{웹 인용|url=http://www.uriminzokkiri.com/index.php?ptype=book&no=2354&pn=30|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701072525/http://www.uriminzokkiri.com/index.php?ptype=book&no=2354&pn=30|title=《동방의 성인》으로 불리운 세종대왕|archivedate=2019-07-01|website=[[우리민족끼리]]|access-date=2019-07-01}} </ref> 또는 리조조선(李朝朝鮮)}}<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된 《[[백과전서 (1983년)|백과전서]]》 제2권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3년) 547쪽에는 “리조조선”의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나라이름은 조선이였으나 오늘의 조선 또는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왕실의 성을 따서 리조조선 또는 리씨조선이라고 부르며 이를 략칭하여 리조라고도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리조조선의 범위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이다. </ref>, [[1392년]] ~ [[1897년]])은 [[유학 사상|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18년간 다스렸던 왕조이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무관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고, 조선 후기에 조선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llang|en|'''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약칭:'''DPRK'''}}), 약칭은 조선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의 북반부를 통치하는 [[국가]]이자 옛 조선과는 다른 국가다.<ref>{{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32099|제목=[여의도포럼-이진우] 북한은 국가다|성=교수|이름=이진우|날짜=2018-11-13|웹사이트=국민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6-25}}</ref>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평양직할시]]이다. UN이 추정하는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2,550만 명이다.<ref name=":0">{{웹 인용|url=https://population.un.org/wpp/|제목=World Population Prospects|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10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816232627/http://esa.un.org/unpd/wpp/index.htm|보존날짜=2015년 8월 16일|url-status=dead}}</ref> 공용어는 [[한국어|조선어(한국어)]]이며, [[평양말|평양]]을 중심으로 이룩됨을 내세운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는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영토로 하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국가단체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 실효지역은 미수복영토이다<ref>{{웹 인용|ur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724/65400600/1|제목=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날짜=2014-07-24|언어=ko|확인날짜=2020-02-12}}</ref><ref>{{웹 인용|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642|제목=靑, ‘북한과 합의는 조약 아냐...위헌 불성립’ - 통일뉴스|언어=ko|확인날짜=2020-02-12}}</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자국을 '''조선'''(朝鮮), '''공화국''', '''조국''', 혹은 '''북조선'''이라고 지칭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건국 때부터 [[국무원]] 고시에 의하여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을 금지하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만 쓴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조선반도]]의 [[북위 38도]] 이북 지역에서 [[소련군]]에 의해 [[소련군정|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조선반도 총선거'에 기초하여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국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정부가 공식 출범하였고<ref>{{서적 인용 |저자=김재영 외|제목=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날짜=2001-04-02|판=초판 2쇄|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37-8}}-03910|쪽=321~322}}</ref>, 이 날을 [[인민정권 창건일]], 다른 말로 [[9.9절]]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9. 그러나 현재까지 대한민국, 일본의 정부는 이들의 정부 출범을 합법적이라고 보지 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명시적으로는 합법적인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또한 자신을 조선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여긴다.
== 개요 ==
 
통치 형태는 형식상 [[다당제]]이지만 [[조선로동당]]의 강령에 반대하는 당이 없는 관계로 사실상 [[일당제|1당]] [[독재]] 국가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실상 [[전제군주제]] 국가로 본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한국 전쟁]],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여 수령 중심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손인 [[김정일]], [[김정은]]은 차례로 집권를 하며 선대의 수령주의를 이어받은 정치를 펼쳤다. 이 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의 당<ref>{{웹 인용|url=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sumryMenuId=PO006|제목=통일부|성=통일부 정치군사분석과|이름=조선노동당|날짜=|웹사이트=통일부 북한정보포털|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8일}}</ref>인 [[조선로동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조선 환조|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의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사생아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행사하였고, [[토지개혁|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는 막을 올린다.<ref name='kaa_10107017_001'> [[#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년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ref> [[1393년]] [[음력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ref name='kaa_10202015_001' />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ref name='kaa_10310025_001'> {{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002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4년(태조 3) 음력 10월 25일|권=6권|출판사=|장=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확인날짜=2018-12-13|인용문=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ref>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 일가의 의지에 따라<ref>{{웹 인용|url=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제목=북한 통치 이념|성=통일부|이름=|날짜=|웹사이트=통일부 북한정보포털|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7일}}</ref>,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언급<ref>{{뉴스 인용|url=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03011315578|제목='조선없는 지구 깨야'는 김정일 발언|성=최선영|이름=|날짜=2003년 1월 13일|뉴스='조선없는 지구 깨야'는 김정일 발언|출판사=한국경제신문|확인날짜=}}</ref>, '수령결사옹위정신', '자력갱생'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수령 중심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왔다. 이를 위해 경제 개방을 포함한 외부와의 전면적 교류를 꺼려 외부에서 이 국가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단, 체제 유지를 위해 군사 부문에 많은 지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인권에 대한 제약이 현대의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추측이 있다. 비정부기구 [[휴먼 라이츠 워치|휴먼라이트워치]]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전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국가로 소개하듯<ref>{{웹 인용|url=https://www.hrw.org/ko/world-report/2019/country-chapters/325799|제목=북한2018|성=휴먼라이트워치|이름=|날짜=|웹사이트=북한2018|출판사=|확인날짜=2020년 2월 7일}}</ref> 체제 유지 목적을 위한 주민들에 대한 외부 정보 유입의 차단, 종교의 자유 박탈, '성분'이라는 사실상 신분제 도입, 정치적 반대의 무조건적 금지 등 강한 기본권 제한이 있다는 의혹이 이 국가의 외부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된다.
형 [[조선 정종|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 받은 태조의 아들 [[조선 태종|이방원]](태종)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하여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며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조선 문종|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 힘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애민정치를 펼쳤다. 이후 왕위에 오른 [[조선 단종|단종]]을 [[계유정난]]으로 몰아낸 그의 삼촌 [[조선 세조|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조선 예종|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조선 성종|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이런 기본권 제한을 부인하지만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내부 음성 자료의 유출로 이 의혹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는 유엔총회 차원에서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인권 결의안이 채택된 이유 중 하나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nocutnews.co.kr/news/5243971|제목=UN, 북한인권결의안 채택…"가장 책임 있는 자" 표현도 포함|성=장규석|이름=UN, 북한인권결의안 채택…"가장 책임 있는 자" 표현도 포함|날짜=2019년 11월 15일|뉴스=UN, 북한인권결의안 채택…"가장 책임 있는 자" 표현도 포함|출판사=|확인날짜=}}</ref> 이런 체제 유지 시도에 대한 부작용으로 고조선부터 일제강점기라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인 대한민국은 물론 구 공산권 국가에 비해서도 빈곤이 만연해지고, 그 부조차 소수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분배되어 다수의 주민들의 빈곤과 삶의 질 악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이 국가를 관찰하는 시각에서 제기된다. 이 국가의 정부는 이를 부인한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oosungha/seoullife-08132015142415.html|제목=주성하의 서울살이|성=주성하|이름=|날짜=2015년 8월 14일|뉴스=광복 70주년에 조명하는 북 빈곤 이유|출판사=자유아시아방송|확인날짜=}}</ref>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을 [[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중종|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조선 인종|인종]]과 [[조선 명종|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조선 선조|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워 [[붕당|붕당 정치]]가 탄생했다.
 
== 국호 ==
200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쫒아낸 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에서 참패를 당했다.
{{한국사}}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朝鮮)'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조선|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왕조 시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씨조선(리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北韓)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ref>[[대한민국 헌법]] 제3조 참조</ref><ref>대한민국의 법을 해석하는 대한민국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니라 [[반국가단체]]로 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 영토 일부를 불법 점령 중인 것으로 이해한다.</ref>,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ref>[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7017700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f>,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ref>[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17830500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f>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 + 북한'이다. 요컨대 한국어 사전상 북한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밖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본을 예로하에 동일본(東日本)/서일본(西日本) 구분처럼,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전제로 대한민국 내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교|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후기로 접어든다.
 
아울러 '북한'이라는 용어에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보는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정에서는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 효종|효종]]이 [[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치부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조선 현종|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조선 숙종|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붕당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희빈 장씨|장희빈]]의 소생 [[조선 경종|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 '조국' 등으로 부르고,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nowiki/>'''', 혹은 '''북조선'''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경종의 아우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서학(→[[천주교]])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선 정조|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zh|t=北韓|p=Běihán|h=베이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llang|ja|北朝鮮|기타초센}})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9세기]] [[조선 순조|순조]]·[[조선 헌종|헌종]]·[[조선 철종|철종]] 3대에 지속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했다. 외척 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신정왕후 (조선)|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그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이다.
 
== 역사 ==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요구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대응했다. [[1873년]]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끌어내렸고, 이로써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나, 실권자는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비]]였다.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명성황후|민비]]는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한 뒤,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1876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일본 제국]]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 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났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 자치를 추구했고, 이어서는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참고|한국의 역사}}
 
=== 고대에서 근대까지 ===
[[1895년]]에 일제가 친러파 민비를 암살(→[[을미사변]])하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 나라의 위치에 고대에는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더 정확하게는 현재 [[둥베이]]의 일부분도 포함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복속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 있던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대동강]] ~ [[원산만]]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했으나, 곧 [[발해]]에 복속했다. 한편 그 이남 지역인 [[황해도]]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다. [[고려]] 때에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렸으며,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승려 [[묘청]]은 한 때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자 난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웠으나 곧 망했다. 한편 [[함경도]] 지역은 [[고려]]가 차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여진족]] 등의 치하에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팔도|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 (1383년)|김종서]]와 [[최윤덕]]은 [[조선 세종|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특히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宣川)·정주(定州)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 국호 ==
=== 대한제국 ===
{{한국사}}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파일:King Taejo Yi 02.jpg|섬네일|왼쪽|200px|[[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어진]]
조선은 공식 명칭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주로 대조선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ref name='kza_11312017_002' /><ref>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5296&cid=1593&categoryId=1593 대조선국우정규칙(大朝鮮國郵征規則)] 참조. </ref> 흔히 '''조선'''(朝鮮) 또는 '''조선 왕조'''(朝鮮王朝), '''이씨 조선'''(李氏朝鮮), '''이왕조'''(李王朝), '''이조'''(李朝)라고 부르기도 하였다.<ref>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100400209201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47-10-04&officeId=00020&pageNo=1&printNo=7401&publishType=00020 조선(朝鮮) 말살론(抹殺論)의 일면(一面)] 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 (1947.10.04, 칼럼/논단) </ref><ref>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30400209215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3-04&officeId=00020&pageNo=15&printNo=21755&publishType=00020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일제(日帝)조어 「조선(朝鮮)」 으로 써야 옳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동아일보 구독자 김복중 씨의 주장(1992.03.04) </ref>
 
=== 역사일제 강점기 ===
{{참고|일제 강점기}}
{{본문|조선의 역사}}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옛 대한제국의 38선 이북 지역은 소련군, 38선 이남 지역은 미군이 각각 점령했다.
 
=== 현대 ===
조선([[1392년|1392]]~[[1897년|1897]])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며,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눠 전기와 중기로 보아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한다. 이때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1592년|1592]]~[[1598년|1598]])이며, 전기-중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1506년|1506]]), 중기와 후기는 [[임진왜란]] 또는 [[병자호란]]([[1636년|1636]]~[[1637년|1637]])이다.
{{참고|북조선인민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북위 38도#삼팔선|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準委員會)를 세우자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화(赤化)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한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이 연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만들고, 이후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된다. 이후 [[북조선인민회의]]와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에 취임했다.
=== 전기 (1392~1506) ===
1388년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으로 인하여 정몽주가 제거되고,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조선 태조|태조]](재위 1392년 ~ 1398년)가 되었다.<ref name='kaa_10107017_001' />
 
=== 한국 전쟁 ===
[[1393년]]에는 국명을 [[명나라]]로부터 선택받아 조선으로 고치고<ref name='kaa_10202015_001' />, [[1394년]]에는 [[개경]]의 민심이 안 좋아 한양으로 천도하여<ref name='kaa_10310025_001' />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 태조|태조]]는 재위 기간에 [[조선의 공신|개국공신]]에게 권력을 거의 다 주어 특별히 한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개국공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반감을 품은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켜<ref name='kaa_10708026_001'> [[#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8026_001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ref> 정권을 장악하다가, [[1400년]] [[조선 정종|정종]](재위 1398~1400년)의 선위로 집권했다.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재위 1400~18년)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파일:SeoulWarDamage2.jpg|섬네일|왼쪽|한국 전쟁 - 폐허에서 구조 화물을 뒤지는 여인]]
{{본문|한국 전쟁}}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한국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은 학문 · 군사 · 과학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조선 세조|세조]](재위 1455~68년)는 [[조선 태종|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 성종|성종]](재위 1469~94년)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
==== 개국 초기 ====
[[파일:Kim Il Sung Portrait-2.jpg|섬네일|[[김일성]]]]
[[파일:영의정하연부부영정3.jpg|섬네일|왼쪽|170px|[[조선 세종|세종]]대 마지막 [[영의정]]이자, 승평수문의 재상인 [[하연 (1376년)|하연]]의 영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공산주의 운동)|소련파]] 계열, [[연안파 (공산주의 운동)|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4세기]] 말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무신인 [[조선 태조|이성계]]는 [[왜구]], [[홍건적]], [[몽골족]], [[여진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조선 태조|태조]])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다(→[[위화도 회군]]).
{{인용문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 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꾸었다.
*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공산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 주체사상의 헌법 규범화
* 국가주석제 도입 및 권한 강화
* 집단주의 강조(조직적체계)}}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공산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회군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모든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고려 우왕|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다.”라고 참소(讒疏)하여 폐위한 뒤 [[고려 창왕|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듬해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사전 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게 했다.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산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ref>김당택, 《우리 한국사 (정치사 중심의 새로운 한국 통사)》, 푸른역사, 501쪽</ref>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척살(斥殺)하고, 그 해 [[음력 7월 17일]]([[8월 5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공양왕|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은 이성계가 마침내 조선을 건국했다.<ref name='kaa_10107017_001' />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성계는 건국 후 1년이 되어서야 국호를 바꾸었다.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ref name='kaa_10202015_001' />, [[1394년]] 음력 1월에 [[한성부]]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 왕자의[[김정일]] 정권 ====
[[파일:Kim Jong-il on August 24, 2011.jpg|섬네일|[[김정일]]]]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인 [[의안대군 (이방석)|의안대군 방석]]을 [[황태자|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방석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무안대군 방번]],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조선 정종|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고,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의 임금인 [[조선 정종|정종]]이 되었다.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여 [[김정일]](金正日)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었고 비축물자도 없었다. 전투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넷째 왕자 [[회안대군|회안대군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음력 11월에 양위하여 [[조선 태종|태종]]이 왕위에 등극하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사일 발사 사건|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직할시]]에서 만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 사대교린 정책 ====
{{참고|사대교린}}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이 관광 도중 살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외교면에서는 [[명나라|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다. 특히 이성계는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을 취한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 [[김정은]] 정권 ===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였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의 예를 취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에 형식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았다.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명을 침공하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이성계였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선의 왕을 “조선 국왕”이라고 처음 부른 때는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파일:Kim Jong Un with Honor Guard portrait.jpg|섬네일|[[김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4성 장군|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 (군인)|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여진족의 거주지를 침공하여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 정벌|쓰시마 섬(대마도)을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최소화했다. 대마도주는 이후 조선의 신하이자 [[막부]]의 [[다이묘]]로 활동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사대 정책과 교린 정책은 조선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서 왕위에 오른 [[조선 태종|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해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했다. 또한, 지방제도인 8도 정책도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자리 잡은 정책이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파일:Hunminjeongum.jpg|섬네일|200px|[[훈민정음]] ([[조선 세종|세종]])]]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제목 = 北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전면전 준비' 언급|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년 3월 8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3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311025446/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보존날짜 = 2013년 3월 11일|url-status = dead}}</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ref name="imnews.imbc.com"/> 이에 [[대한민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국방부 또한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ref name="imnews.imbc.com"/>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조선 세종|세종]](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했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했으며,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해서 국경선을 확정했고, 남으로는 [[대마도 정벌]]을 통하여 일본 [[왜구]]의 약탈을 방지했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아울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했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인 《[[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뤄진다.
 
[[4월 26일]], [[대한민국]]의 [[류길재]]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했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제목 = 정부 "개성공단 남측인원 전원철수"…폐쇄 위기|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년 4월 2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7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531115855/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보존날짜 = 2013년 5월 31일|url-status = dead}}</ref>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1.kr/articles/1109709|제목 = 개성공단 126명 1차귀환 완료..29일 전원철수(종합)|저자 = 조영빈|날짜 = 2013년 4월 27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7일}}</ref>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479593|제목 = 北 개성공단 마지막 체류 50명 중 일부만 귀환 허가(1보)|저자 = 박지환|날짜 = 2013년 4월 29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9일}}</ref>
세종의 맏아들 [[조선 문종|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조선 단종|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는 쉽지 않아 병권을 잡은 [[김종서 (1383년)|김종서]]가 국사를 봤으나, 세종의 차남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정난(→[[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대신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조선 세조|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학살당한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많은 학자를 양성하던 [[집현전]]을 폐지했다. 세조는 [[조선 태종|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했다.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세조의 손자인 [[조선 성종|성종]]은 개국 이후의 처음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조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했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2017년 09월 0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동창리]] 미사일 기지를 폭파 및 폐쇄하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대량숙청 되지만,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대부분 숙청되었고, [[조선 인종|인종]] 때 잠시 등용되었지만, [[조선 명종|명종]] 때 [[을사사화]]로 훈구,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 선조|선조]] 때 비로소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 (정치)|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520148600504|제목=트럼프 "북한 핵시설 5곳"…영변 外 시설 더 있나|성=김동현|날짜=2019-05-20|언어=ko|확인날짜=2019-08-11}}</ref><ref>{{웹 인용|url=https://mnews.joins.com/article/23474577|제목=트럼프 "북핵 나머지 3곳", 서위리·강선·분강 지하시설 가능성|날짜=2019-05-21|언어=ko|확인날짜=2019-08-11}}</ref>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ref>{{웹 인용|url=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08111452001|제목=북, 신형 단거리 '3종 고체 발사체 세트’로 스커드 액체 미사일 대체|날짜=2019-08-11|확인날짜=2019-08-11}}</ref>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중기 (1506~1637) ===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다. 특히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2019년에만 5월 4일에 1발 (고도 60여km, 사거리 240여km), 5월 9일에 2발 (고도 45~60여km, 사거리 420여km 및 270여km), 7월 25일에 2발 (고도 50여km, 사거리 600여km), 7월 31일에 2발 (고도 30여km, 사거리 250여km), 8월 2일에 2발 (고도 25여km, 사거리 220여km), 8월 16일에 2발 (고도는 30여㎞, 사거리 230여㎞)등을 발사하였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조선 선조|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그들이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당쟁의 기반이 되는 등 심각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의 [[킬 체인|킬체인]]체계 하의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미사일방어체계]]와 [[THAAD|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 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이 대두하였고 군대를 만들었으나 실천은 하지 못했다. 그 반대로 [[북학론]]도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 정부(조정)의 무능함이 크게 대두되는 시기다.
 
==== 정치 구도의 변화 ====
[[조선 중종|중종]]은 [[1506년]] [[음력 9월 2일]],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 중종|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 사림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조선 13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벌어졌다. 약 12년 간의 섭정으로 정국은 상당히 혼잡해졌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국가주석]]직을 신설해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해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2조 국가는 계급 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강화하여 내외 적대 분자들의 파괴 책동으로부터 인민 주권과 사회주의 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ref>로 점철되는 일당 독재<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ref> 체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과 일반적인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유교적인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102217195&code=910303 경향신문 2010.10.10. 김정은 후계 공식화 ‘대미’… 북, 행사 첫 생중계]</ref> 2011년 김정일이 죽자 후계자가 되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정치 구조가 퇴폐하여 2009년에는 "모두가 찬성 투표하자"라는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546051 '모두찬성투표하자!' 평양거리의 선거 벽보] 2009년 2월 26일 《뉴시스》</ref>
[[1567년]] 왕위에 오른 [[조선 선조|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숙청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복권했으며, 훈구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 (정치)|동인]]과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 최고인민회의 ===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본문|최고인민회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 국방위원회 ===
==== 경제 체제의 해이 ====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산하기관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 [[국가보위성]]
*** [[인민무력성]]
 
=== 내각 ===
[[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하였다.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 정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대 지도자 ===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하였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에 해당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가 관행이 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이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여 양인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목록}}
* 1대: [[김일성]]
* 2대: [[김정일]]
* 3대: [[김정은]]
 
== 대외 관계 ==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하였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한중 관계 (1992년)|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ref name="동아19880913"/>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2761&cid=43865&categoryId=43866 북한과 루마니아의 관계], 루마니아 개황, 2006.9, [[대한민국 외교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재인용</ref>
==== 임진왜란(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과의 7년 전쟁 ====
{{본문|임진왜란|정유재란}}
[[파일:Turtle boat.jpg|섬네일|왼쪽|150px|[[거북선]].]]
[[파일:Dongnaebusunjeoldo.jpg|섬네일|200px|《동래부순절도》]]
 
최근에는 이란의 핵 포기선언, 쿠바가 미국과의 수교를 선언, 잇따른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하여 중국과 러시아 이외의 국가와는 사실상 국교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 20만 병력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 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압도당했다. [[부산진성]]의 [[정발 (1553년)|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에 일본군에게 무너졌다. 그리고 [[상주시|상주]]의 [[이일]]과 [[충주시|충주]]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의 군대도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궤멸당한다. [[조선 선조|선조]]는 뚜렷한 전략 없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로 피난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 대한민국과의 관계 ===
이 기세로 가면 [[의주군|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해전|옥포]]·[[사천 해전|사천]]·[[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 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어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크게 격파당했고(→[[행주대첩]]),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명나라에서도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본문|남북 관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고 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과사전|《력사사전》]] '남조선괴뢰정부' 항목</ref>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 후에도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특히 수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대한민국]]에 ‘조선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서울]]에 침투하였던 사건인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이 있다. 또한 [[1974년]] [[8월 15일]]의 [[문세광]](文世光)에 의한 육영수 저격사건, [[1983년]]에 발생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서 대한민국에 대한 침투를 시도하였으며, [[1976년]] [[판문점]]에서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도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장 [[간첩]] 120명을 15개조로 나누어 [[울진]]과 [[삼척]]지구의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있다. [[1987년]]에는 대남공작원 [[김현희]]를 이용하여 [[대한항공 858편]]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1996년]]의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9년]]과 [[2002년]]에 [[황해]] 서북방에서 각각 발생한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그리고 [[2008년]]에 [[금강산]]에서 여행 중이던 [[대한민국]] 관광객 박왕자가 피격당한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금강산 피격사건]] 등 여러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2010년에는 연평도 일대를 포격하여 군인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하였다. 2015년에는 조선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목함 지뢰를 설치하여 대한민국 군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5년간의 지지부진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그다음에 벌어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명량 해전|명량]]에서 크게 격파당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노량 대첩]]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이순신이 이 전투에서 총을 맞고 전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적으로는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등의 인접국가들의 경제 지원과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업지구]]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6년]] [[10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실험]]을 강행하여 남북 관계는 소원(疎遠)해졌으며, 각종 남북 협력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2007년]] [[6자 회담]]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타결로 활발히 재개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얼어붙게 되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노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을 압박, [[남북 관계]]의 차단을 경고해 왔으며, 결국 최근에 중단되고 말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17592 <北 '남북관계 전면 차단' 초강수 두나>(종합)]</ref> 그리고 [[로동신문]]의 논평에 대해서 각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체로 대한민국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17662 <北논평원 글 전문가 견해>(종합)]</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58347 <개성지역 민간교류는 '정상 진행'>(종합)]</ref>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2008년]] [[12월 1일]]부터 [[한반도의 군사 분계선|군사 분계선]]을 통과하는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60945 北군부 "12월1일부터 분계선통과 엄격 제한,차단"(종합)]</ref>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화를 제의했으며, 군사 및 실무차원에서 장비지원을 제의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28&aid=0001974147 군사 실무차원 장비제공 제의]</ref>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계속 보이고 있자, 남측은 강경한 입장에서 조금씩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65314 대북 빗장푸는 정부.."北 호응해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32&aid=0001984918 北 강경조치에 ‘뒷북 지원책’ 잇따라]</ref>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은 [[11월 15일]]에 남북관계의 회복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직할시|평양]]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31&aid=0000150099 민노당 15일부터 평양 방문, "남북관계 촛불 될 것"]</ref> 4박 5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대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이라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79&aid=0002009721 민노당 "北, 이명박 정부에 워낙 강경입장이라…"]</ref> 민주노동당은 북측 고위급 인사의 말을 인용해서 현 남북 관계가 최악이라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214&aid=0000086079 北 "최악의 남북관계‥파국 치달을 수도"]</ref>
==== 전후 복구 사업 ====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해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다. [[임진왜란]] 초기 도성이 함락되어 노비 문서와 군적 등이 불에 탔고, 이후에도 전란 중에 [[노비]], [[호적]] 등의 문서가 소각되어 많은 양의 도망 노비와 유랑민이 나타났고, 이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 관광 중단, [[개성공단]] 축소 등을 통보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3&aid=0002394371 <종합>北, "개성공단 축소·개성관광 중단·남북 철도 중단"]</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1528 北개성안내원 "이제 닫히면 언제 열릴지..."]</ref> [[대한민국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선 희박하지만 배제 못한다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2729 金통일 "개성공단폐쇄, 희박하나 배제 못해"(종합)]</ref>
또한, 임진왜란 직후에 조정에 곡식과 금전 등을 내고 관직을 사는 [[공명첩]]과, [[선무군관]] 등의 임명장을 발행하여 조정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전란 중의 호적자료의 소실로 일부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은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들이거나 위조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2009년]] [[11월 10일]] [[인천광역시]] 대청도 인근 해상 북방 한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정에게 [[대한민국 해군]]에서 경고를 하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비정에서 공격을 가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반격을 가하면서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정이 반파되었다. 그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하며 가혹한 군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였다. 2010년 3월 26일에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을 어뢰로 침몰시켰다. 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였고, 이 포격으로 해병대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 본토로 피난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전쟁 중 세운 공로로 벼슬을 받거나 노비에서 면제된 이들을 다시 노비로 환원시켜 불만이 일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전후에 대한 사료를 보강하고 공이 있는 노비와 양인에게는 역을 면제시키거나 관직을 제수하였다. 전쟁 직후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백성 구휼과 부역 면제 등의 시책을 활용하는 한편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중립적인 외교를 새롭게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게 밀려나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조선 인조|인조]]를 왕위에 옹립하였다(→[[인조반정]]).
 
[[2008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25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통일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72325 "2025년께 남북 통일될 수도"<美국가정보위>]</ref> 대북인권결의안이 [[11월 21일]]에 통과되고 [[대한민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76519 北인권결의안 채택..남북긴장 심화될 듯]</ref> 북측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말을 인용, 점점 대남압박 행동조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77745 北, 대남압박 행동조치 본격화 전망]</ref>
==== 인조 반정 ====
{{본문|인조반정|병자호란|정묘호란|삼전도의 굴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압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매체를 통해 대한민국을 맹비난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3&aid=0002399224 <종합>北 "대결 미치광이의 허망한 잠꼬대" 남측 맹비난]</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55&aid=0000146823 수위 높여가는 북한의 대남압박, 다음 수순은?]</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은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4017 北신문 "남북관계 개선위해 대북정책 바꿔야"]</ref> [[민주당 (대한민국)|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부]]의 남북 관계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대북대책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3184 민주, 남북문제 대정부 공세 `고삐']</ref> 야 3당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52&aid=0000227723 야3당, "정부, 대북정책 전환 선언해야"]</ref>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2057740 金통일 “北‘군사도발’ 가능성 있다”]</ref> [[2008년]] [[12월 5일]]에 [[대한민국 통일부]]는 12월 1일에 남북간 육로통행의 차단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지원사업 및 경협은 활발하다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96836 통일부 "평양 경협.지원사업은 진행 중"]</ref> [[조선신보]]는 [[2008년]] [[12월 10일]]에 [[6자회담]]으로 참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협상태도를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32&aid=0001988481 조선신보 “南, 6자회담 중재자서 훼방꾼으로” 협상태도 비판]</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11&aid=0001983075 北조선신보 "남측은 6자회담 훼방꾼"]</ref> 반면에 [[국민행동본부]] 등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북측의 비난행동의 맞대응으로 정상회담 때 중단하기로 한 전단을 살포하기로 하였다.<ref>[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newsid=20081208003207462&p=khan 한나라 ‘대북 삐라살포’ 지원법안 추진]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0031&newsid=20081208080224270&p=dt&RELATED=R1 &#91;클릭! `넷 브리핑`&#93; 대북 삐라 살포 놓고 보수-진보 갈등 확산]</ref>
[[조선 인조|인조]]는 [[능창대군|능창군]]의 친형으로 북인 정권의 광해군의 서형인 [[임해군]] 처형, [[영창대군]] 사사, [[진릉군]] 처형, [[칠서의 변]], [[인목대비]](인목왕후) 폐모론 등의 옥사를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을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하고 [[1623년]] 3월 반정을 계획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공신|반정 공신]] 내부에서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이 발생하였다.
 
[[2009년]] [[1월 17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참모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과 전면대결태세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58868 北총참모부 "대남 전면대결태세 진입할 것"(종합)]</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277&aid=0002087932 북 전면대결 선언, 그 의미와 파장은?]</ref> 그리고 대한민국에선 대북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인민군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59926 정부, 대북경계태세 강화..북한군 동향 주시]</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명을 통해 남측과 전면대결태세에 돌입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정치권은 반응이 엇갈린 상태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59620 정치권, `北 군사위협' 인식차]</ref> 남측에 위치한 [[서해]] 5도는 성명발표 뒤에도 평온속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59997 "처음도 아닌데"..서해5도 '평온속 긴장']</ref>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한 단체가 한반도 위기를 주장했다고 [[조선중앙통신]]에서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69675 北단체, 한반도 위기 주장]</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성명을 통해 남북간의 기존 군사적, 정치적 합의사항을 무효로 한다고 선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77088 北최고수준 대남압박..향후 남북관계는]</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존에 있던 사항들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면서 황해에 위치한 [[서해 북방한계선]]은 화약고가 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32&aid=0001995536 불가침·비방금지 등 모두 파기…NLL 대립 ‘화약고’ 가능성]</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에 직원을 30일이상 억류하고 있으며, [[2009년]] 5월 1일에는 대남 입장을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sid2=268&cid=264705&iid=83547&oid=001&aid=0002639832 <北, 개성 직원억류 장기화하나>(종합)]</ref>
=== 후기 (1637~1897) ===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하지만 남인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싸우다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는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몰아내는 '''일당 전제화 현상'''이 일어나고 환국이 자주 생기는 기이한 일이 반복되면서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하였다.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여기자가 석방되었으며 곧이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유씨가 석방되었다. 또한 조선인민군에 억류되었던 어선들이 귀환하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위급 인사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 과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그 밖의 통일부 장관, 기타 거물급 정치인들과 면담하면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2009년]] 9월달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 처음으로 이산가족상봉이 금강산에서 이루어졌으며 [[남북 관계]]에 순풍이 조금씩 불고 있었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었고,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2017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잇따라 도발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있다. 특히 연달아 [[중거리탄도유도탄]]을 발사하고 6차 핵실험을 강행한 바 있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였고, 친일적인 갑오개혁이 있었다. 친일세력은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고(→[[을미사변]]), 일본군이 의병 학살을 하는 사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김정은은 4월 9일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의 날짜와 장소를 처음 공개했다.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개최되는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한반도 핵의 단계적 동시적 조치 주장에 동의를 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선 핵포기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둔 외교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0/2018041090142.html|제목=北, 김정은 동선 이례적 공개…"27일 판문점서 정상회담"|언어=ko|확인날짜=2018-04-11}}</ref>
==== 병자호란 ====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조선 인조|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후금, 여진족)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국왕 인조가 청의 황제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왕자들, 백성들이 볼모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청과 조선 간의 군신 관계가 확립되었다.
 
남북은 2018년 7월 14일 판문점에서 장성급 군사회담을 열고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원하는 데 합의했다. 서해 군 통신선은 복구됐으나 동해 군 통신선은 2011년 5월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한 이후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후에 국방부는 서해지구 남북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구해 모든 기능을 16일부터 정상화했다고 2018년 7월 17일 밝혔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850676|제목=국방부 "서해지구 남북 군 통신선 완전 복구"|성=조민성|날짜=2018-07-17|뉴스=SBS NEWS|언어=ko-KR|확인날짜=2018-07-19}}</ref>
한편 조선 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임진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폭파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협박 통보한 지 사흘 뒤인 [[2020년]] [[6월 16일]] 오후 2시 49분경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동의없이 '''폭파하였다.'''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판문점 선언]]과 [[9·19 공동성명|9.19 군사합의]]를 사실상 파기를 한 것과 같다 [[2007년]] [[참여정부]] 시기에 지어진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ref>{{저널 인용|제목=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저널=|성=|이름=|url=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82%A8%EB%B6%81%EA%B3%B5%EB%8F%99%EC%97%B0%EB%9D%BD%EC%82%AC%EB%AC%B4%EC%86%8C_%EC%82%AC%EB%AC%B4%EC%B2%98&oldid=26844831|날짜=2020-06-21|출판사=|언어=ko}}</ref>
====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효종|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론|북벌]]을 준비했다. 그렇게 하여 45,000명의 군사력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북벌론은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 [[대한민국]] 측의 주장 ====
현종과 숙종은 서인을 잠시 배척하기도 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했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 아래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ref>[http://ko.wikisource.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A%B5%AD%EA%B0%80%EB%B3%B4%EC%95%88%EB%B2%95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제1장 제2조] 에서는 "반국가단체"를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간주된다. [http://freedom.jinbo.net/new_http/bbs/view.php?id=column&no=89 ②국보법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요?] - 최병모 변호사, [http://jus.snu.ac.kr/~kukcho/bbs/view.php?id=board30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24 〈2003.06.23 동아〉 국가보안법 개폐 금요대토론] - 법학자 [[조국 (법학자)|조국]], 《조국 교수의 사랑채》 게시판, [http://www.tongil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76613 화해협력시대를 반영한 역사적 판단] -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통일뉴스》</ref>.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123 개폐 논란 ‘계류중’] 1994년 9월 1일 《시사저널》 253호</ref>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ref>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웹사이트에 실린 [http://www.615.or.kr/board/view.php?&bbs_id=non&doc_num=1445 2009년 2월 27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실천연대 조작사건 1심 재판 참관 후기] {{웨이백|url=http://www.615.or.kr/board/view.php?&bbs_id=non&doc_num=1445# |date=20090803133355 }} 중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이재봉 교수의 말</ref>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ref>대법원 국가보안법 관련 판례 참조</ref>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ref>{{웹 인용 |url=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43/66/IMG/NR004366.pdf?OpenElement |제목=ODS HOME PAGE |확인날짜=2018년 9월 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3061108/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43/66/IMG/NR004366.pdf?OpenElement |보존날짜=2013년 10월 23일 |url-status=dead }}</ref>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ref>{{웹 인용 |url=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51/12/IMG/NR005112.pdf?OpenElement#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1-10-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109070659/http://daccess-dds-ny.un.org/doc/RESOLUTION/GEN/NR0/051/12/IMG/NR005112.pdf?OpenElement# |보존날짜=2015-01-09 |url-status=dead }}</ref> 또한 이를 확인했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하였다. 한편,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하였다.
 
=== 중국과의 관계 ===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하였다.
{{참고|조중 관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승준 |제목=한국과 중국 100년 |연도= 2010|출판사=기파랑 |위치=서울 |id={{ISBN|978-89-91965-12-6}} |쪽= 16|인용문 = ...1949년... 중국은 이보다 닷새 뒤인 10월 6일 북한과 수교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간주하는 듯 했으나,...}}</ref> 한국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조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한중 관계 (1992년)|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한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9722.html | 제목=북-중,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출판사 = 한겨레신문사 | 뉴스 = 한겨레21 | 날짜 = 2011-06-06}}</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위화도]]와 [[황금평]]을 100년간 임대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world/201010/h2010102802314422450.htm&ver=v002 |제목= "北, 中에 황금평·위화도 100년간 임대" |출판사= 한국일보사 | 날짜 = 2010-10-28}}</ref>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72554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72554] 2010-12-27 노컷뉴스</ref> 베이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2/09/0200000000AKR20110209045600073.HTML "北 무역상 베이징서만 1천명 외화벌이"] 2011-02-09 연합뉴스</ref>
==== 붕당 정치의 변질 ====
{{본문|붕당}}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 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특히 [[조선 현종|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인]]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논쟁이 정체(政體) 문제와 관련되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송논쟁은 [[조선 효종|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國喪)에서 [[장렬왕후|자의왕대비]]의 복제(服制)문제, 곧 어떤 상복을 입느냐는 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적장자가 아닌 차자로서 왕통을 이은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서인]]의 주장은 임금도 임금 이전에 사대부로서의 예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고, [[남인]]의 주장은 임금은 사대부의 예가 아닌 다른 예가 가능하다는 주장으로서, 결국 [[서인]]은 신권중시 사상을, [[남인]]은 왕권중시 사상을 대표한다. [[1659년]](현종 원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숙종 원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하였다.
 
=== 일본과의 관계 ===
그러나 [[경신환국]]에 따라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 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등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참고|한일 관계}}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ref name="글로벌 한일관계 한·일 양국간의 문제점">《[[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일본의 관계#한·일 양국간의 문제점|한·일 양국간의 문제점]]〉</ref>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 문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테러국가 지정해제를 받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오히려 엄격한 제재조치로 전환하였다.
 
=== 러시아와의 관계 ===
이때 [[조선 숙종|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의 잦은 환국은 [[조선 경종|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조선 경종|경종]] 때에는 [[왕세자#왕세제·왕세손|왕세제]]가 된 [[조선 영조|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참고|한러 관계|러시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
1956년경, [[박영빈]]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은 미국과 평화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평화 공존 정책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격분하여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과 직접 전쟁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빩은이들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를 단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f>김학준, 《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1995) 185~186</ref>
 
1961년에는 소련과의 상호 협력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1996년에 효력이 상실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는 군사 동맹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것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 독일과의 관계 ===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파일:Bundesarchiv Bild 183-1987-0130-315, Berlin, Nordkoreanische Botschaft.jpg|섬네일|베를린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1987년)]]
[[파일:Bundesarchiv Bild 183-20634-0003, Berlin, Ankunft von koreanischen Gaststudenten.jpg|섬네일|독일민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칼 마르크스 대학(라이프치히)에 유학중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들 (1953년)]]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인해 평양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의 권리는 국제법상 공식적으로는 [[스웨덴]] 대사관에 귀속되었다. 1만6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공관이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95592]</ref> 2000년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이 세워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29930]</ref> 2002년 1월 서방국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 스웨덴과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지만 대리대사가 이끌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75184]</ref>
 
==== 탕평기타 정치의 전개 ====
* '''{{ROC}}''': [[1992년]]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단교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영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으로 나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 '''{{USA}}''': 건국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을 주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많은 선전물에 미국을 적대시하는 등 미국과는 수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최근 6.12 북미회담으로 한동한 관계가 좋아졌다가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2월 27일 [[제2차 북미회담]]에서 결렬된 이후 다시 사이가 악화될 지도 모른다.
* '''{{SPA}}''': 2000년 12월 15일 스페인 정부는 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한반도 화해와 정상화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공식적으로 외교관계 수립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040385]</ref> 그러나 대사관 설립여부는 밝히지 않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042936]</ref>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한 국가들의 상주공관은 평양보다 베이징에 훨씬 더 많이 있는 실정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79&aid=0002036976]</ref>
* '''{{SWI}}''': 1974년 2월 27일, 취리히에 통상대표부를 개설하는 등 대 스위스 경제교류 촉진책을 써왔고, 1974년 12월 19일에 스위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1220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12-20&officeId=00020&pageNo=1&printNo=16377&publishType=00020 |제목=스위스北傀 修交합의 |출판사= [[동아일보]] | 날짜 = 1974-12-20 |쪽=1}}</ref> 스위스의 인도적 대북 지원량이 1997년 들어 급증하자, 1997년 8월 5일부터 9일까지 발터 푸스트 스위스 외무성 인도주의협조총국장을 수석대표로 한 외무성대표단이 방문해 평양에 스위스 외무성 직원 1∼2명이 상주하는 사무소를 개설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공개 합의했다. 1998년 평양주재 스위스 외무성 사무소가 설치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539163]</ref>
* '''{{ITA}}''': 2000년 1월 [[G7]]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2001년 6월 20일 마테오 피카리엘로 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 서울 사무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경제 사절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최초의 이탈리아 경제사절단의 평양 방문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 하나인 뱅카 나치오날레 델 라보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C.S.I 테오레마, 의류업체 오벰 등이 포함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128553]</ref> 2001년부터 이탈리아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학생과 의사, 연구원들을 이탈리아에 초청해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연간 20명 정도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664556]</ref> 평양에는 이탈리아 외교부 산하 개발협력처 평양 사무소가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6333]</ref> 평양의 광복거리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방장이 피자 재료까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원래의 맛을 추구하는 평양 최초의 이탈리아 피자가게가 2008년 12월 문을 열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1990834]</ref> 2009년 평양에 이탈리아 요리 전문식당이 하나 더 생겨 모두 3곳으로 늘면서, 피자와 스파게티가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203783]</ref>
* '''{{POL}}''': 2010년 [[쇼팽]] 탄생 200돌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공동음악회를 열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北, 쇼팽 탄생 200돌 기념 폴란드와 공동음악회 |url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31958 |출판사 = 노컷뉴스 |저자 = 안윤석 대기자 |날짜 = 2010-11-12 |확인날짜 = 2010-11-17}}</ref>
* '''{{FRA}}''': 1972년 6월 파리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이어서 1984년 12월 그것을 일반 상주 대표부로 승격시킨 바 있는 이 때, [[대한민국 정부]]는 윤석헌 주프랑스 대사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항의의 뜻을 표했었다. 또한 평양에 프랑스와의 합작투자 호텔을 건립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드문 선물을 주면서 서방국가에 외교적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ref name="동아19880913">{{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130020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13&officeId=00020&pageNo=1&printNo=20599&publishType=00020 |제목=韓-헝가리 代表部설치 의미와 波長 |출판사= [[동아일보]] | 날짜 = 1988-09-13 |쪽=3}}</ref>
* '''{{HUN}}''': 1988년 조선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대사로 임명한 것을 두고 권력 계승을 둘러싼 갈등 문제와 관련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만큼 헝가리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ref name="동아19880913"/>
* '''{{GBR}}''': 2001년 7월 28일 주 런던 대사관이 임시 개설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138068]</ref> 2003년 4월 30일 최수헌 조선 외무성 부상이 주 영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런던 서부 주택가 일링의 거너스버리에 위치한 130만 파운드 짜리 저택을 매입해 대사관으로 개조했다.<ref name="news.naver.c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0065493]</ref> 서유럽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에 이어 6번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외교공관이며, 개관식에는 최수헌 외무성 부상, 리시홍 대리대사, 주 영국 중국 대사, 영국 외무부 관계자, 하원의원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개관식이 열리는 동안 대사관 앞에서 영국 인권단체인 세계기독연대(CSW·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와 ‘릴리즈 인터내셔널(Release International)’이 공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ref name="news.naver.com"/>
* '''{{SWE}}''': 스웨덴은 반제국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197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75년 3월에는 서방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대사관을 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 출신의 외국인([[대한민국]], [[일본]] 제외)은 스웨덴 대사관이 보호한다.
* '''{{YEM}}''': [[예멘]]에서는 조선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Koryo Traditional Medicine: an oriental solution for Yemeni patients |저자= Nadia Al-Sakkaf |url= https://web.archive.org/web/20090605033112/http://yementimes.com/article.shtml?i=1224&p=health&a=1 |출판사= Yemen Times |언어= 영어}}</ref>
 
== 군사 ==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 정치는 그의 손자인 [[조선 정조|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 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 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는 조치였다. 또한,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에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임금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정조의 치세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사색당파]]가 보편화하였다.
[[파일:North Korean soldier Demilitarized Zone of Korea 2005.jpg|섬네일|공동경비구역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병사(2005년)]]
{{본문|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노동당의 '당군'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병제|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만 보면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되었고 장비를 움직일 자원조차 부족하다. 또한 주적인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조선인민군은 대부분 식량부족이 심각하며 이는 민가에 대한 악탈과 체력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이유 때문에 현재 조선인민군의 90%는 전투 불가능 상태이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장사정포|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 </ref>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 세도정치의 전개 ====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세도정치의 시작은 조선 사회 쇠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1800년]], [[조선 정조|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조선 순조|순조]](재위 1800~34년)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 · [[조선 헌종|헌종]](재위 1834~49년) · [[조선 철종|철종]](재위 1849~63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한때 약화하였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하였다. 이는 [[조선 선조|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 정치 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 정치가 완전히 붕괴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백성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초래했는데,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MiG-21]] 등 전투기들을 무인 항공기(UAV)로 개조하였다. 이란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민란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 아래 수많은 몰락한 농민과 영세농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도 세도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조선에서는 괴질이라고 불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서학]](→[[천주교]])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10,000 ~ 13,000&nbsp;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흥선대원군의 섭정기 ====
[[파일:이하응 초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흥선대원군]]의 초상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nbsp;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nbsp;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조선 후기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 이명복이 [[조대비]]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올라 [[대한제국 고종|고종]](재위 1863~1907년)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했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해,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한양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한양 재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었다. 이즈음에 불린 [[판소리]] [[경복궁타령|경복궁 타령]]의 가사에서 백성들의 고단함과 굶주림을 알 수가 있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의 백성 수천여 명이 [[병인박해]]에서 처형되었다. 자국의 성직자가 피살된 [[프랑스 제2제정|프랑스]]는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이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과 의궤들을 모두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1866년]])).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실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배상, 통상 교섭을 요구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여 방어하는 조선군을 전멸시켰으나, 이후 본토로 돌아갔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1871년]]) 이후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은 찾는 듯했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무모함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의 시기를 놓쳤다.
=== 대량살상무기 문제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문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침략 ====
{{참조|한일 관계#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초부터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10월 18일]]([[음력 9월 20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강화도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써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ref name="글로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조선초의 대외관계|조선초의 대외관계]]〉 </ref>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 (1842년)|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404952 美, `北핵보유국' 표기해명..수정은 안해)</ref>
[[파일:개화기 조선.JPG|왼쪽|섬네일|개화 후의 영친왕<small>(가운데)</small>과 내각대신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11월 13일]]([[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뒤이어 [[대영제국|영국]], [[독일 제국|독일]], [[러시아 제국|러시아]], [[프랑스 제3공화정|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4쪽. </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본문|임오군란|갑신정변}}
{{참조|한일 관계#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음력 8월에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 행정 구역 ==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윤치호]]·[[홍영식]] 등이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한다. 바로 개화파는 군사를 동원해 낙성식에 참여한 대신들은 물론 불참한 수구파 대신들을 처형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파일:Divisions of North Korea ko.svg|섬네일|400px|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3[[특별시]], 9[[도 (행정구역)|도]], 3지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정변 주도자 중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처형되었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이들의 가족 친척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 ====
{{본문|동학농민운동|전주화약|갑오개혁|청일전쟁}}
{{참조|한일 관계#갑오개혁}}
[[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170px|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 직할시 ===
조선 조정의 개화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청-일-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인 침투(쌀 강제 수탈)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 [[평양직할시]]
 
=== 특별시 ===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화의 욕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았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 [[라선특별시]]
* [[남포특별시]]
* [[개성특별시]]
 
=== 도 ===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황토현 전투]])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이것을 빌미로 일본군은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같이 군사를 파견하자 이를 막으려고 농민군과 전주성에서 [[전주화약]]을 맺는다. 농민군은 [[전봉준]] 중심으로 조정에 [[전주화약|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고, 조정도 중앙에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난이 진압되었다는 조정의 발표를 무시한 일본이 기습적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습격해(→[[갑오왜란]]) 불법적으로 점령했다. 이후 [[교정청]]을 폐지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교정청]] 출신 [[김홍집]]과 친일인사로 [[갑오개혁]]에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시|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전봉준]] 등)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ref>
* [[평안남도]]
* [[평안북도]]
* [[함경남도]]
* [[함경북도]]
* [[황해남도]]
* [[황해북도]]
* [[자강도]]
* [[량강도]]
* [[강원도]]
 
=== 지구 ===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난이 진압되었다는 조정을 발표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갑오왜란]]) 고종을 협박하여 [[명성황후]] 민씨 세력을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교정청]]을 폐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교정청]] 출신 김홍집과 친일인사를 기용한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 [[신의주특별행정구]]
* [[금강산관광지구]]
* [[개성공업지구]]
 
== 지리 ==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 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파일:Choseon Imperial family.jpg|섬네일|250px|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실 가족 (1910년)]]
[[파일:朴泳孝作 朝鮮國旗.jpg|섬네일|오른쪽|120px|[[박영효]]의 태극기 ([[1882년]] [[9월]])]]
{{본문|을미사변|아관파천|삼국간섭|시모노세키 조약}}
{{참조|한일 관계#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시간 ===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간섭]]을 시도하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막고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1835년)|김윤식]], [[이범진 (1852년)|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친러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본문|평양시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를 [[평양시간]]이라고 부르며, 현재 [[동경 135도|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 위치와 면적 ===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위도|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경도|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특별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nbsp;km²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ref name="TY">[http://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sumryMenuId=SO301 북한 지역의 위치와 면적]</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nbsp;km²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nbsp;km²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nbsp;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자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어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 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학살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여러 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다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 정치지형 ===
[[파일:North Korea Topography.png|섬네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형도]]
{{본문|조선의 통치 기구}}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 행정기구 조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7824&mobile&cid=46629&categoryId=46629]
=== 중앙 정치 체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본문|조선의 정치제도}}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하였다. 중앙 정치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하여 운영되었다. 기본 9품에 조와 종이 있어 모두 18품계를 이루었다. 또한 주요 직급자인 [[당상관]]과 실무진인 [[당하관]]으로 나눈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뉜다. 경관직은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그 밖에 여러 관직이 있으며, 외관직은 지방 행정 구역에 따라 정해졌다. 6조는 서로 업무를 나누어 맡았으며, 정책 회의 등에서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운영하는 방법에 따라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로 나뉜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왕권을 견제하는 [[언관]]이자 [[청요직]]이었던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있으며, 이밖에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직속 수사기구인 [[의금부]], 왕명을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 지방 행정 제도기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쾨펜의 기후 구분|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참고|조선의 행정 구역|팔도}}
 
=== 식생 ===
조선 초기의 행정 구역은 고려 말의 행정 구역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 (행정 구역)|도]], [[팔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모든 군현에 지방관인 수령을 파견하였다. 또 인구의 증가와 자연 촌락의 성장에 따라 현 아래의 단위를 정비하여 [[면리제]]가 정착되었으며,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이 소멸하였다. 수령에 대한 감찰을 위한 상설기구인 관찰사를 전국 8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하였다. 또, [[역원제]]와 [[봉수제]], [[조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파일:Siperiantiikeri Korkeasaari.jpg|섬네일|왼쪽|전과범(시베리아호랑이)]]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 지하자원 ===
[[1895년]]([[대한제국 고종|고종]] 32년)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을 [[이십삼부|23부제]]로 개편하였다가, 이듬해 8월 기존 팔도 중의 다섯 개의 도를 남·북도로 나누어 모두 [[13도제|13개의 도]]로 행정 구역을 재개편하였다.<ref> 칙령(勅令)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官制改正件〕〉(《[[고종실록]]》[[:s:고종실록 33년 8월#8월 4일|33년 8월 4일]]) </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 과거경제 제도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본문|조선의 과거 제도}}
[[파일:Korea electricity.PNG|섬네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빨강)과 대한민국(파랑)의 전기 사용량 비교]]
[[파일:Earthlights in nkorea.jpg|섬네일|[[미국 항공우주국]]이 2000년에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부분의 지역이 어둡게 나타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그러나 경제 이외에 다른 요소들을 반영할 경우 사실상 후진국이다.
 
이에 반론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곽인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의 반론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북한 내부 현금보유액은 총 1,000억달러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그 중 민간 부문에서는 430억달러, 정부 부문이 700억달러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관리 등용 제도에는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 [[음서]], [[취재]], [[천거제]], [[특지]]가 있었다. 음서는 ‘문음(門陰)’이라 불렸는데,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천시되어, 음서로 요직에 진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대략 평양 주민의 100만 명이 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3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평양 외곽 지역까지 따지면 100만 명 보다도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GDP 규모로 따지면 평양만 2,700달러가 넘는다.<ref>{{웹 인용|url=http://www.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88|제목=[곽인옥 교수의 평양워치(21)]평양 돈주들 현금보유액은 얼마? - e경제뉴스|성=숙명여대 교수|이름=곽인옥|날짜=2019-08-14|웹사이트=e경제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3}}</ref><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61222070800002|제목=KDI "평양 1인당 소득 2천700달러…북한 다른 지역 3배"|성=기자|이름=박대한|날짜=2016-12-22|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3}}</ref>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의 종류에는 [[과거 제도|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ref> 잡과 과목은 [[외국어]] 분야의 [[역과]](易科), [[천문학]] 분야의 [[음양과]](陰陽科), [[의학]] 분야의 [[의과]](醫科), [[법률]] 분야의 [[율과]](律科)였다. </ref>가 있었다. 그중 잡과는 [[서얼]]이나 [[중인]], 일반 상민들이 주로 치렀다. 과거는 대체로 정기적으로 치러졌으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열거나 왕의 재량으로 열 수 있었다.
 
[[평양직할시|평양시]]는 상류층인 왕돈주와 대돈주와 중돈주가 합하여 5%이고 중류층인 소돈주가 15%가 있고 중산층인 돈주급은 20%가 존재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각종 부정이 늘어나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관리 등용 제도가 개편되면서 과거는 폐지되었다.
 
그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지방에는 대돈주 2부류와 중돈주를 합한 상류층은 1.7%가 존재하고 중류층인 소돈주는 4.5%가 존재하며 특히 돈주급은 전체 지방의 2%가 존재한다.
== 사법 ==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이 규정한 [[조선경국전]]과 [[대명률]]에 근거한 법이 자리 잡았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과 그 후속 법률인 [[대전회통]]과 [[속대전]], [[대전통편]] 등이 대명률과 함께 쓰였다.
 
즉 지방은 대돈주와 중돈주 그리고 소돈주를 포함한 상류층 5%, 돈주급과 중간층을 포함한 중류층 25%, 150달러를 버는 하류층 70%로 구성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ajunews.com/view/20180726145931169|제목=북한 무역회사 및 물품의 유통 구조|성=숙명여대 교수|이름=곽인옥|날짜=2018-07-26|웹사이트=아주경제|출판사=|확인날짜=2020-07-07}}</ref> [[파일:Pyongyang 125.73173E 39.02390N.jpg|섬네일|평양직할시의 위성 사진]]
법을 관장하고 죄인을 심문, 형벌을 구형하는 기관은 [[형조]]였고, 죄인을 체포, 추국하는 곳은 [[의금부]]였으나, 죄인을 수사, 국문하는 기능은 형조, 의금부 모두 갖고 있었다. 그 밖에 현대 한국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한성부]]에서도 체포, 수사의 기능이 있었다. 국왕의 직속 사법 기구 는 의금부라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차 5개년 계획|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한성부와 8도의 관찰사 이외에 각 지방의 [[부윤]], [[부사]], [[도호부사]], [[목사]], [[군수]], [[현감]], [[현령]], [[면장]] 등에게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한이 주어졌으며, 이들 면장과 그 상급자인 현령, 현감, 군수, 부사, 목사, 도호부사, 부윤, 이들의 상급자인 관찰사 등으로 형률 시행이 보고되었으며, 관찰사는 최종적으로 의금부와 형조에 수사, 처벌 결과를 보고하였다. 관찰사의 판결에 이의가 있는 자는 한성부에 제소하기도 했다. 한성부는 한성부 내의 사건 사고 외에도 각 타도의 사건 사고도 일부 담당하였는데 이는 송나라의 영향이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909006005 (北 오늘 9·9절) ‘北 정권60돌’ 최대규모로… 주민은 ‘원조’ 연명}</ref>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미국 달러|달러]]로 추계된다.
지방관의 판결에 이의가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는 [[수령고소금지법]]이 제정되어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는 [[1455년]] 세조의 집권으로 폐지되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조선시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법은 형법과 민법이었으며, 경국대전에 종합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의 법 조항이 소략하기 때문에 형법은 대명률이 주로 적용되었다. 대명률은 명의 기본 법전으로 태장도유사의 5형 형벌 체제인 [[당률]]을 계승하면서 [[자자]](刺字)와 [[능지처사]](凌遲處死) 같은 극형을 추가하였다. 민법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관습법에 따라 처리하였다.
 
[[2002년]]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 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나 이 조치의 실시 결과로 계획 메커니즘을 제외한 시장형 메커니즘을 전부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경제개혁의 재평가와 전망|저널=대외경제정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임수호|날짜=2015-12-30|쪽=p. 42}}</ref>
== 경제 ==
 
[[파일:땔감장수.png|섬네일|170px|조선 말기의 땔감장수 또는 나뭇꾼,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상업과 무역, 상인은 천대시 받았다. 1880년경 촬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 (경제)|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파일:신발장수.png|섬네일|170px|조선 말기의 신발(짚신) 상인으로, 짚신 행상이다. 1880년경 촬영]]
 
{{본문|조선의 경제}}
하지만 [[200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결국 물가가 폭등을 하면서 결국 2010년 2월부터 다시 시장이 개방이 되었고 5월 26일에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5.26 지시를 발표하여 부분적인 경제 개혁안들이 실행을 하여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화폐개혁-이후-북한의-시장-통제-조/|제목=화폐개혁 이후 북한의 시장 통제 조치 일지|성=기자|이름=남궁민|날짜=2010-11-30|언어=ko-KR|확인날짜=2020-01-10}}</ref><ref>{{웹 인용|ur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00615/29114187/1|제목=“北 식량배급 포기… 장마당 전면허용”|성=주성하|이름=|날짜=2010-06-15|웹사이트=동아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2-14}}</ref>
{{참조|조선 후기의 농촌 경제|조선 후기의 상업|조선의 공업과 광업}}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은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ref name=":1" />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ref name=":1">{{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1211148200504|제목="北, 시장사회주의 초입…제재가 체제변화동력 약화할 수도"|성=이준삼|이름=|날짜=2019-12-11|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3-10}}</ref>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815038400504|제목=文대통령 "北, 시장경제 도입"…북한판 경제개혁 어디까지 왔나|성=기자|이름=류미나|날짜=2019-08-15|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3-10}}</ref>
 
=== 기아문제 ===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779426 북한주민 기대수명 남한보다 11세 낮아</ref><ref name="통계청">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108780 북한 ‘고난의 행군’ 5년 동안 주민 33만 명 굶어 죽어</ref>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굶주린 서민들이 많은 실정이다.
 
1995년 이후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주민들의 식생활을 책임질 수 없는 ‘구호경제’ 체제로 접어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북은 2008년 곡물 최소 소요량 520만t 가운데 380만t만 자체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족분 140만t은 남한이나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ref name=autogenerated1 />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측정하는 '[[세계 기아 지수|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08년 세계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18.8점으로 기아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해당 리포트에서 기아 상황이 악화된 10개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제외한 9개국이 모두 아프리카 나라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62795|제목=이슈 > 최신기사 “北, 90년대 이후 ‘기아지수’ 세계 2위”|성=양정아 기자|이름=|날짜=2008-10-14|뉴스=|출판사=데일리NK|확인날짜=}}</ref> 최근까지도 식량난이 나아지지않고 있으며, 북동쪽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7&oid=005&aid=0000329897 북동지방 중심으로 전역 확산]</ref>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조선로동당|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58690 "北, 대남 경협기구 축소개편"<방북 전문가>]</ref>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59910 <北대남경협기구 개편설 의미는>(종합)]</ref>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8&oid=001&aid=0002389246 北 "라면 대량생산 통해 식량난 극복한다"]</ref> 그 효용성은 의문이다.
 
201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2010 [[세계 기아 지수|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지수는 19.4점으로 20년 전인 1990년 때의 16.2점보다 굶주림 위험도가 20%나 늘었으며, 작년도인 2009년의 18.4점에 비해서도 1점 가량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연도에는 총 9개 국가들이 기아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기아율이 증가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앉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905|제목=아시아에서 북한만 기아인구 증가|저자=김상욱|날짜=2010-10-12|웹사이트=|출판사=뉴스타운|확인날짜=2017-07-28}}</ref>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3/2011050300951.html WSJ, 방북한 카터에게 연일 맹공]</ref>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밝혔다.<ref>{{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news/102111-Amos-132332333.html |제목=유엔 OCHA 국장, "북한, 외부 식량 지원 필요성 확인" |확인날짜=2011-1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025063339/http://www.voanews.com/korean/news/102111-Amos-132332333.html |보존날짜=2011-10-25 |url-status=dead }}</ref>
 
2014년 미국 워싱턴의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는 11일 유엔이 정한 ‘[[세계 식량의 날]]’을 맞아 발표한 ‘2014 [[세계 기아 지수]](2014 Global Hunger Index)’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굶주림 상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평가했다. 세계식량정책연구소의 미셸 피에트로우스키 대변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시아에서 굶주리는 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rfa.org/korean/in_focus/foodhunger-10132014163114.html|제목=“북, 아시아서 기아율 최고”|성=김진국|이름=|날짜=2014-10-14|뉴스=|출판사=자유아시아방송|확인날짜=}}</ref>
 
2016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는데, 비록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0/17/0200000000AKR20161017161100098.HTML|제목="北기아지수 2000년 40.4→올해 28.6 개선…여전히 심각 수준"|성=bingsoo@yna.co.kr|이름=|날짜=2016-10-17|뉴스=|출판사=연합뉴스|확인날짜=}}</ref>
 
2019년 [[세계일보]]의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이후 북한에 결식자가 거의 없다는 응답도 나왔음을 알수가 있는데 하루 식사를 몇회 했느냐는 질문에 거의 90%는 하루 세끼 이상이라고 답했음을 알수가 있고 주식으로는 백미를 먹었다는 응답이 70%로 지난해 45.3%에 비해 크게 올랐으며 고기에 대한 섭취율은 50%가 일주일에 한두번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매일이라고 답한 비율도 만만치 않았다<ref>{{웹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91104512983|제목=北 부유층 중심 새 결혼 풍속도… ‘5장6기’ 대신 ‘손오공아’ 뜬다|날짜=2019-11-05|언어=ko|확인날짜=2020-01-10}}</ref>
 
=== 전력문제 ===
[[대한민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량은 216억 kWh로, 한국의 70년대 후반 1인당 발전량 수준에 불과하고 같은 해 한국의 발전량은 5220억 kWh로, 북한의 24배에 달한다.<ref name=":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설비용량은 2007년 795만kW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희천발전소를 비롯한 발전소 잇단 준공으로 2014년 725만kW까지 늘어났다.<ref name=":2" />
 
하지만 이는 북한이 1987년에 발표한 제3차 7개년 계획의 발전 설비 용량 목표치인 1천700만kW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대한민국 통일부]]가 지난 2013년 탈북자 1,07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장기업소의 하루 평균 전력 공급 시간은 거의 12시간으로 조사되었다.<ref name=":2" />
 
전력 공급 중단 시 자체 발전을 통해 전력 공급을 한 곳은 14.9%에 불과하고 2011년 이후 공장 내 생산라인 평균 개수는 거의 19개로, 이 가운데 가동된 라인은 절반 미만에 그쳤다.<ref name=":2" />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력 수급의 60%를 담당하는 수력 발전이 가뭄과 겨울철 갈수기 등 기상 여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불안정하다는 데 있고 지난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2014년에 이어 지난해 6월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가동률이 떨어졌음을 한국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 연구 위원이 말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s://www.voakorea.com/korea/korea-economy/3396898|제목=[기획보도] 북한 전력문제 해결 시급..."외부 자본·기술 도입해야"|성=김은지|이름=|날짜=2016-06-29|웹사이트=미국의 소리|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4}}</ref>
 
하지만 이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정책적으로 태양열 이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김정은]]은 2010년대 중반부터 태양열 등을 활용한 자연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해 이용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양열 패널 가격은 2 - 3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렸고 태양열 발전 시설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이 자유로워 열 효율이 개선돼 패널의 크기나 무게도 줄었으며 웬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정에서는 대부분 태양광 설치가 끝나 수요도 감소세로 보이고 있고 대신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태양열 시설은 늘고 있다.
 
데일리 NK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이나 원산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평북 염천 등 내륙 산간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세대별 태양광 발전 보급률은 50%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태양광-사용-가정-절반-넘어서발전용량이-빈부/|제목=北 태양광 사용 가정 크게 늘어…발전용량이 빈부격차 반영|성=기자|이름=강미진|날짜=2019-04-04|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ko-KR|확인날짜=2020-03-04}}</ref>
 
대부분의 살만한 주민들은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민은 거의 모두 태양광 패널을 달며 크기가 작은 건 150W 태양광 패널이고 큰 것은 200 - 250W라고 밝히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사용 시간은 최소 8시간에서 최대 13시간까지 사용을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기가 일정하게 안 와서 [[인버터]]도 따로 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태양광 패널에 [[이차 전지|축전지]]와 [[인버터]]가 함께 나온다고 밝히고 [[중국]]에서 파는 태양광 패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실정에 맞게 인버터가 같이 나와서 이제는 인버터를 잘 안 산다고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전력도-자력갱생-北주민-태양판-좋아져-국가-전/|제목=전력도 '자력갱생'...北주민 “태양판 좋아져...국가 전기 안 바라”|성=기자|이름=문동희|날짜=2019-03-04|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4}}</ref>
=== 직업 ===
[[파일:Pyongyang Metro.JPG|섬네일|[[평양 지하철도]]]]
[[1992년]] 개정된 공산주의 헌법 70조에 따르면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나 국가기관에서 배치한 데 따라 일해야 하며 그 기준이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성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고위층 인재 채용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일어나면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4년]] 1월부터 정치, 경제 과목 등의 시험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인사정책이 개선, 신세대 엘리트들이 출현하는 등 인력구조의 전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ref>http://news.kbs.co.kr/article/politics/200801/20080128/1500239.html{{깨진 링크|url=http://news.kbs.co.kr/article/politics/200801/20080128/1500239.html }} 북한 상식 백과-北, 채용과 직업관 부는 변화의 바람 KBS(한국방송) 〈남북의 창〉2008년 1월 28일자</ref>
 
현재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사적 고용의 확대는 달리 보면 노동시장의 발달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적 고용의 확대는 아직까지 대부분 비공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돈주는 물론 평범한 장사꾼들과 가정주부들도 일공을 채용해 구멍탄을 빚는 것이 시간과 돈을 절약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종전에는 자신이 석탄을 구입해 구멍탄을 직접 만들어 온 주민들이 최근에는 구멍탄을 만들어 주는 일공을 고용하고 있다.<ref name=":4">{{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도시-골목-구멍탄-찍어내는-일공日/|제목=“北도시 골목 구멍탄 찍어내는 일공(日工) 즐비…진풍경”|성=기자|이름=설송아|날짜=2015-10-13|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5}}</ref>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돈주들에게 일꾼을 알선해 주는 인력시장이 증가하고 있고 인력을 주선해 주고 돈을 받는 거간꾼들은 장부까지 만들어 알선한 머슴들을 관리하고 있다.
 
양강도 혜산시 양강일보사 옆에서 압록강 주변 도로까지 길게 이어진 인력시장에서 젊은 남성 꽃제비들이 헐값에 거래되고 있고 이 시장에 가면 소규모 장사꾼으로 위장한 중매쟁이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이들을 찾아가면 필요한 인력을 언제든지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중매쟁이들은 일일 잡일로부터 몇 년이라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일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ref name=":5">{{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je-06232015094707.html|제목=북에서 늘어나는 ‘노예시장’|성=김지은|이름=|날짜=2015-06-23|웹사이트=자유아시아방송|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3-05}}</ref>
 
실제 소식통은 도 농촌 경리 위원회가 지난해 말 주체 농법 총화를 위해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에 의하면 평안남도의 내륙 산간지역에서 농경지를 묵인 농장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면서 농장이 땅을 묵이게 된 것은 농민들이 농촌을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떠나는 현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산간 지역 농민들이 농사만 짓다가는 굶어 죽을 것 같다고 하면서 농장을 떠나는 현상이 늘어 사회적 문제로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ref name=":6">{{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산간지역-농장들-묵힌-땅-사용권-판매-나서원인/|제목=北 산간지역 농장들 '묵힌 땅' 사용권 판매 나서…원인은?|성=기자|이름=하윤아|날짜=2020-01-28|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ko-KR|확인날짜=2020-03-05}}</ref>
 
=== 주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조선로동당]], [[내각]], [[조선인민군]]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부엌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2000년대 들어 평양에서는 집 다음에 계급투쟁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동산 열풍이 지속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부동산 투자로 100만 달러 이상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들은 30평대 아파트를 3 - 4만 달러에 분양받아 인테리어를 한 뒤 최고 10만 달러에 되팔아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들 브로커는 국내 돈주뿐만 아니라 화교 상인이나 조선족의 자본을 유치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 민간 사업자는 자금력을 가진 국내외 개인일 수 있고 여러 명의 컨소시엄 형태나 단체일 수도 있다.
 
이들은 건설 자금 - 자재 - 장비 등에 필요한 일체의 자금과 현물을 제공하고 대개 자재는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되고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제2경제, 인민보안성 등과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현재 신설되는 아파트의 약 80%가 민간에 의해 건설되고 있으며 신축된 아파트의 1/3 정도가 종합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의 아파트 건설시장과 도시정치|저널=한국개발연구원|성=연구위원|이름=홍민|url=|날짜=2014-08|출판사=|쪽=p. 43 - 45}}</ref>
 
[[평성시]]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데 계획외의 의한 건설을 보면 일단 형식은 도시건설사업소 명의를 대여받고 돈과 자재가 있는 개인이 모여 아파트 건설기획을 하고 해당 건설 부지 인근 공장기업소에 찾아가 이야기하며 합작투자를 한다.
 
공장기업소는 자신들의 종업원 주택 건설 실적을 높이는 차원에서 이 기획을 대부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며 해당 공장은 인민위원회에 찾아가 종업원 주택이 모자라니 인민위원회가 주택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면, 인민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면 이게 승인이다.
 
그러면 해당 공장은 개인 투자자와 함께 예산서를 작성하며 작성된 예산서를 들고 도시설계사업소에 가서 건설 종합 허가 문건을 달라고 요청하면 거기에 토지승인서, 설계예산서, 시공도면까지 도시설계사업소에서 알아서 해준다.
 
시공과정에서 개인들이 시멘트, 강재, 목재, 노력 등을 대며 인력의 경우 역전이나 시장 인근 인력시장에서 구해오며 벽돌을 지어 나르는 사람부터 미장공, 전기 수리공, 철근 조립을 할 줄 아는 사람 등 기술자들을 끌어온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면 해당 명의를 빌려준 공장에는 형식상 몇 세대 분만 주고 나머지는 투자했던 개인에게 돌아가며 명의를 빌려준 공장은 실적만 갖게 되는 방식이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브로커는 인민위원회 주택부에 가서 주택지도원에게 1,000달러를 주고 입사증을 떼어 와서 구매자에게 주며 가령 구매자에게 1만 달러로 팔면, 결국 9,000달러를 벌게 되는 데 이 중 일부를 브로커에게 준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의 아파트 건설시장과 도시정치|저널=한국개발연구원|성=연구위원|이름=홍민|url=|날짜=2014-08|출판사=|쪽=p. 50 - 52}}</ref>
 
=== 화폐개혁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
 
[[2009년]] [[11월 30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개혁조치|7·1 경제개혁조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72763|제목=북, 17년 만에 '화폐개혁'... "강성대국 재원마련 고육지책"|날짜=2009-12-01|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390735.html 북 화폐개혁]</ref><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2/01/0200000000AKR20091201046000014.HTML 북한, 화폐개혁 왜 단행했나]</ref><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12/02/0511000000AKR20091202144800014.HTML] 北화폐개혁 혼란 계속..교환조건 잇따라 조정</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는 충언을 하다가 결국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알수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co-jj-01152013105129.html|제목=[김씨 일가의 실체] 북한 계획재정부장 박남기 처형의 실제 원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2-14}}</ref>
 
하지만 2013년 이후 2019년 북한연구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반론이 나왔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013년 이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당국의 통화 정책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정연욱 박사에 따르면 쌀 가격 등으로 추정한 북한의 물가 상승률은 2011년 229%까지 폭등했지만, 2014년에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5% 이내로 안정됐음을 알수가 있고 계속 안정중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북한의 환율 추이를 보면 불안정하던 환율은 2013년부터 8천원 선을 굳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가 가능하던 이유로는 통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와 악화일로로만 걷지 않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하였음을 알수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1011041700504|제목="北, '조용한' 통화정책 2013년부터 진행…물가 안정 성과"|성=정성조|날짜=2019-10-11|언어=ko|확인날짜=2020-01-10}}</ref>
 
===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
{{본문|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 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7747|제목=北, 금년 4월부터 중국식 경제개혁 하려 했다!|성=기자|이름=최경선|날짜=2012-02-03|웹사이트=코나스넷|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6-01}}</ref>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539572.html|제목=“북한 김정일 사망 직전 경제 개혁 추진”|날짜=2012-06-25|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었으나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 담당 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2014년]] 5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내각]] 기관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5.30 경제개혁조치|5.30 담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이때 담화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 활동을 창의적으로 해 [[조선로동당]]과 국가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가 생산과 관리에 주인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 관리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가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nocutnews.co.kr/news/4349978|제목=북한 '5.30조치', 김정은 제1비서의 경제관련 담화|날짜=2015-01-06|확인날짜=2020-02-14}}</ref>
 
현재 [[김영환 (1963년)|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의 말에 의거하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대 월급 인상률은 일반 공업인에게는 25배의 월급 인상률이 올라 15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고 일반 편의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서는 10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0697|제목="북 국영기업 노동자 월급 0.5$→100$로 200배 상승"|날짜=2018-06-01|언어=ko|확인날짜=2020-02-14}}</ref>
 
이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현재 계획형 기업에도 상당한 액수가 인상이 되었으며 현재 가동률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 60% 가까이 가동률이 올라갔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의 산업 및 산업 정책,|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6|쪽=p. 229 - 236}}</ref>
 
은행에 자금을 예치함으로써 은행이 기업에게 넘겨줌으로 특히 영향력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기반을 담은 규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위험 요소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투자방식이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287}}</ref>
 
차후 채무 상환 불응시 현금 계좌 선 압류 및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즉시 선입금되는 조치로 인한 강제 집행을 통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조항들도 수록이 되어 있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78}}</ref>
 
특히 고정 자산을 임대하거나 혹은 [[내각]]에 관할하에 소규모 기업에게 이관할 수 있음을 차후인 2015년에 공식화 하였으며 이를 2015년 기업소법에 명확히 하였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날짜=2018-08|쪽=p. 129}}</ref>
 
=== 경제난의 후유증 ===
2009년 [[대한민국]]의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현지에서 입수한 동영상에 의하면 심각한 경제난의 후유증으로 병사들이 필로폰을 밀매하는 것이 알려졌다. 군인, 민간인이 결탁한 조직적 거래가 확인되었으며 이것은 평양당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총 32분 분량으로 촬영된 이 동영상은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마약밀매를 여실히 보여주었다.<ref>북한 마약 밀매 현장 포착 동영상 입수 <<주간조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20/2009072001345.html]</ref>
 
== 주민 ==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 인구와 분포 ===
{{참조|한국#인구|설명=일제 강점기 이전의 인구에 대해서는}}
[[201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458만 9,122명(출처:CIA The World Factbook)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200명/km²이다. 인구는 대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해안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2004년 인구 증가율은 약 1%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가속화되어 2002년 기준으로 총인구의 61%가 도시지역에 산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평양직할시|평양]]으로, [[2010년]] 인구는 251만4,692 명이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함흥시|함흥]], [[청진시|청진]]이 이렇게 평양과 3대 대도시를 이루며 그 외 [[남포특별시|남포]], [[개성시|개성]], [[신의주시|신의주]], [[원산시|원산]] 등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동해]]안의 경제 무역 도시인 라진과 선봉이 합쳐 인구 40만 명 규모의 [[라선직할시]]가 되었으며, 이 도시는 [[2010년]] 1월 [[라선특별시]]로 승격되었다.
 
UN이 추정하는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2550만명이지만<ref name=":0" />,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ref>{{웹 인용|url=https://nklogin.com/post/Postmng?ptype=v&contentkey=BFC1558085398|제목=최초 공개-450만 명이 부풀려진 북한 인구 통계의 비밀, 북한 식량위기는 어떻게 조작됐나|성=주성하|이름=|날짜=|웹사이트=NK LOGIN|출판사=|확인날짜=}}</ref> 이 있다.
 
=== 언어 ===
{{참조|문화어}}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둔 언어를 표방한다. 표기상 [[한국어의 한자|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어,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특히 고유어인 "[[동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예를 갖추어 상대방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일상적인 말로 자주 쓰인다.
 
(예)
* 저기 녀성동무, 평양역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 리철진동무, 속히 오시오.
* 판매원동무, 이거 얼맙니까?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어의 말미에 -니다 대신 -네다를 쓴다는 속설이 있으나, -네다를 쓰는것은 황해도 사투리이다.
 
== 사회 ==
=== 인권 ===
{{본문|조선의 사회제도}}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ref>(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307283&iid=145640&oid=020&aid=0002084758&ptype=011 정부, 北 정치범수용소 위치-인원-실태 첫 공식 확인), 《동아일보》, 2009.10.17.</ref>.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66986 유엔아동위 "北, 아편재배 어린이 동원"), 《데일리NK》, 2009.02.01.</ref>,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400&num=66823 北 대표단, 소년병 문제 간접시인 발언"). 《데일리NK》, 2009.01.27.</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 정치범수용소|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 정치범수용소|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 정치범수용소|화성(16호 관리소)]], [[청진 정치범수용소|청진(25호 관리소)]], [[회령 정치범수용소|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ref>{{뉴스 인용|제목 =北 정치범 수용소 6곳… 15만4000명 수감|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1/19/2011011900069.html |출판사 = [[조선일보]] |날짜 = 2011-01-19|확인날짜 = 2011-02-03}}</ref>
 
=== 종교 ===
{{bar box
|title=종교구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titlebar=#d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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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s=
{{백분율 막대|[[주체사상]] 및 [[무종교]]|gray|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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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ref>{{harvnb|김병로|2002|ref=jarroad}}</ref>
 
한국전쟁 이전까지 종교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억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했다. 종교는 사람들을 [[사후세계]]의 행복에 몰두하게 만들고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사회질서를 허용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군정]]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를 [[반동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차원에서 기존의 민간종교조직을 흡수하고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조선기독교연맹과 조선불교도연맹을 세워 이러한 정책을 반영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허용되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개혁을 위한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해방 이전 대부분의 조직들은 일제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된 조직으로서 해방 이후 급속히 힘을 잃고 없어졌다. 신속한 개혁의 차원에서 북한의 혁명주체세력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세력 중 하나이자 지식인들의 집결지인 종교조직을 용인했다.<ref>{{harvnb|김병로|2002|ref=jarroad}}</ref>
 
<!-- [[1946년]] [[10월 12일]]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 25군사령관은 성명서를 통해 예배나 미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반종교 선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는 “실제는 종교 활동에 대한 다양한 제약이 있으며,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있다”라는 견해가 주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의 통일 사상인 [[주체사상]]이 사실상 종교를 대신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의 단계적 혁명 이론을 가르쳤던 [[황장엽]]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주체사상을 취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교수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종교를 믿는 신자들은 종교적 탄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교육 기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때부터 [[1960년]]대까지 종교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국내의 주된 종교로서 [[유교]], 불교, 기독교, 제종교의 요소를 포괄한 천도교가 있다」라고 발표하고 있다.
{{참고|조선의 교육기관}}
조선의 교육기관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4학(四學)이 존재했다(→[[학당]]). 성균관의 입학자격은 소과인 [[생진과]]에 합격한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이 4학이다.
 
=== 명절 ===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에는 [[향교]](鄕校)가 존재했으며,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기능으로 했다. 각 부·목·군·현에 하나씩 있었는데,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500&num=90182 데일리NK 2011년 4월 14일</ref>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이 외에도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서당]](書堂)이 존재했는데,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사설로 운영되었다.
 
== 문화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
[[파일:물장수.png|섬네일|오른쪽|150px|조선 말기의 물장수. 항아리에 물을 이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1880년경 촬영]]
{| class="wikitable"
{{본문|조선의 문화}}
|+평양의 문화단체
{{참조|조선의 어문학|조선의 학문|조선의 과학과 기술|조선의 예술}}
|-
| 음악부문 || 피바다가극단 국립민속악단 보천보전자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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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부문 || 만수대창작단 조선미술가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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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부문 || 조선문학가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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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부문 ||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조선아동영화촬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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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활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 종교예술 ===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본문|조선의 종교}}
 
=== 체육 ===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자학]] 중심의 [[유교]] 사회였다. [[불교]]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철저한 견제를 받았으나, 왕실의 개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신앙으로 이어졌으며, [[무속신앙|민간 신앙]]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정감록]]》{{refn | group="주" | 한 도참 예언가가 말한, 고려 말에 정몽주와 초기에 정도전, 조선 선조 때의 정여립 등을 통해서 정씨가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씨 왕조를 세우는 예언서}}을 들 수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 문학 ===
유교 종교 행사에는 신자들의 혈연적 차별이 있어서, 불교 종교 행사와 달리 그들만의 신앙 모임을 고착화해 유지하기가 수월하다. [[종친회]]의 [[종손]], 학파의 제자, 악공 등의 제사 직접 관련자 식으로 출입이 제한되는 편이다. 불교 종교 시설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지만, 유교 종교 시설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종교적인 폐쇄성]]은 국가의 폐쇄적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출처|날짜=2013-06-05}}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출처|날짜=2013-06-05}}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출처|날짜=2013-06-05}}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로마 가톨릭|천주교]]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으로 탄압받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종교적인 탄압은 신분제 해방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선문학> 1953년 10호, 125쪽).
== 대외 관계 ==
{{본문|조선의 대외 관계}}
 
=== 음악 ===
한편 남쪽의 [[일본]]이나 [[유구 왕국]],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교린정책을 펼쳤다. 교린책은 강온책을 동시에 펼쳤다.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北, 南가요 가사 바꿔 `찬양가요'로 불러 |url =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0/08/02/0505000000AKR20100802194100014.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장용훈 기자 |날짜 = 2010-08-02 |확인날짜 = 2010-08-09}}</ref>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北대학생들,안재욱 노래 부르다 처벌"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0/07/0200000000AKR20101007099200014.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조민정 기자 |날짜 = 2010-10-07 |확인날짜 = 2010-11-21 }}{{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0/07/0200000000AKR20101007099200014.HTML }}</ref>
또한 조선은 만주의 여진족을 정벌하였고, 조선은 여진족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고, 조선에 조공하도록 여진족에 강요하였다.
 
[[평양직할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그러나 여진족이 [[후금]](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에서는 한때 [[병자호란]]의 원한을 갚자는 북벌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조선 효종|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서양]]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선에 들어서 [[아랍인]]이 아닌 [[서양인]]과의 접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들어온 서양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그 뒤 접촉이 없다가 18세기부터 [[천주교]]가 전래하면서 조금씩 늘어났으며, 19세기에 [[서세동점]]과 맞물려 조선도 서양과의 접촉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 영화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이씨조선|조선]] 제 13대 임금 [[조선 명종|명종]] 때 [[도적]], [[림꺽정|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표준어|각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제목 = <북한영상> 북한만화영화의 산실 '4.26아동영화촬영소'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2147240 |출판사 = 연합뉴스 |날짜 = 2008-06-26 |확인날짜 = 2019-09-29}}</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 음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파일:Okryu Restaurant in Pyongyang.jpg|섬네일|옥류관]]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인삼|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 의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23]
 
=== 세계 유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직할시]]와 남포특급시([[평안남도]])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https://web.archive.org/web/20140819090503/http://www.goguryeo.org/murals/m-japan-index.htm 다카마쓰쓰가 (高松塚) 고분] 이나 [https://web.archive.org/web/20140819090503/http://www.goguryeo.org/murals/m-japan-index.htm 키토라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http://whc.unesco.org/en/list/1135 고구려의 유적]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 교육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
=== 유치원, 탁아소, 학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12년제 의무교육 체제에 따라 교육기관은 모두 정부가 운영한다. 그러나 유치원과 탁아소의 경우는 학교와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탁아소의 경우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도 관리되는데 이러한 사생아들은 국가에서 그 목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들을 혁명전사로서 활용한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급한다.
 
=== 교과 내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1698</ref>
 
=== 학생 소조 활동 ===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직할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직할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 고등교육기관 ===
{{참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교 목록}}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김일성방송대학]]이 마련되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 과학 ==
{{본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
 
=== 주체 과학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때 주체과학으로 3대 과학으로 지정을 하였고 특히 '''주체철'''과 [[비닐론|비날론]], '''무연탄 가스화''' 혹은 '''갈탄 가스화'''가 있다.
 
비닐론 혹은 비날론은 1936년 [[리승기]] 박사가 개발한 섬유로써 이때 일본에서 개발하여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고 특히 섬유의 품질이 최상이라 면에 버금가는 화학섬유로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필라멘트 섬유로 만들면 비단과 같아지고 양모와 같은 스테이플 섬유로 만들면 양모보다 성질이 좋고 면직물과 거의 비슷한 품질을 자랑하여 항상 리승기 박사가 항상 입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ref>{{저널 인용|제목=리승기의 비날론 연구와 공업화|저널=서울대학교|성=학사|이름=김태호|url=|날짜=2001-02|출판사=|쪽=p. 16}}</ref>
 
결국 리승기 박사가 월북한 뒤 섬유 과정을 생략하고 원료 공정을 개발하여 무연탄으로 전용하는 과정과 카바이드 공정, 아세트 알데히드를 [[아세트산]]으로 변경하여 원료과정을 개발하여 [[1957년]] 개발에 성공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ref>{{저널 인용|제목=리승기의 비날론 연구와 공업화|저널=서울대학교|성=학사|이름=김태호|url=|날짜=2001-02|출판사=|쪽=p. 29 - 35}}</ref>
 
주체철은 원래 입철이라는 구단광을 [[청진제강소|청진 제강소]]에서 만들었으나 36만 톤의 규모로는 부족하여 개건 공사를 거쳤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도 공사를 거쳐서 입철을 더욱 강화하여 삼화철이라는 구단광을 새로 만들어 제강과정과 함께 사용하였으나 결국 노폐물이 자주 회전로에 끼며 특히 [[코크스]]도 상당부분 많이 넣어야 하여 결국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998년 부터 주체철 사업이 시작하여 회전로 부문과 산소열법 용광로 부문 그리고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을 나누어 회전로 부문은 성진제강련합기업소가 산소열법용광로 부문은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은 [[김책제철련합기업소]]가 나누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회전로 부문에서는 결국 이사업이 10년을 끌동안 이 공법은 실패를 연속으로 하였으며 국내 기술로 활용할 수 없는 인식이 쌓여갔고 특히 결국 젖은 물가마니를 쓰고 특히 불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을 하였다.
 
실패를 통한 학습으로 2004년 50%의 코크스 배합 사용 공법을 달성을 하여 산화 배소 구단광을 만들게 되었으며 하지만 결국 60%로 실수율이 떨어지고 특수강을 생산하여 수출을 하여야 하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등 결국 원점으로 돌려서 개발을 다시 하였다.
 
결국 산소 용융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특히 실험 공장에서 6kg의 산소를 주입하여 2kg의 용선을 출선하는데 성공하자 결국 공업로 도입을 추구하였다.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도 특히 공장이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함께 실험을 계속하자고 하였고 특히 점결제 무사용과 함께 저질 석탄으로 기술 경제 지표를 개선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회전로가 계속 폭발하자 방법이 없던 한 박사가 결국 용융로 안에 들어가서 결국 폭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문제점을 해결해 품질이 좋은 용선이 출선이 되어 김정일이 극찬하고 이를 치하하였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산업혁신체제 연구 : 철강 및 공작기계산업 중심으로|저널=북한대학원대학교|성=석사|이름=강영실|url=|날짜=2015|출판사=|쪽=p. 139 - 148.}}</ref>{{위키공용분류}}[[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는 결국 2003년에는 국가 과학원 5월 28일 금속 연구소에서 발명 특허를 내어 결국 갈탄 제철에 의한 용선 생산법을 완비를 하는데 성공을 하여 이것을 통하여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가 주도하여 시험 공장을 차려서 실험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오류가 나기 쉬웠고 특히 불량이 많았으며 가는 곳곳마다 실패를 하여 결국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컸으며 특히 이것에 대한 포기론도 있었으나 결국 김정일은 한발짝이 아니라 반발짝도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때 1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를 하면서 힘을 내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갈탄 용광로가 개발이 완료되고 실험을 계속한 결과 1차 실험에서는 결국 지표 달성에 실패를 하였는데 반하여 2차 실험에서는 부분적인 달성에만 하였을 뿐 그리하여 결국 성과가 없자 결국 3차 실험에서 정상적인 지표 달성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을 시키고 특히 2010년에 출선을 하는데 성공을 하여 김정일이 치하를 하면서 기뻐하였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 버금가는 주체철 개발이라면서 좋아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결국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가면서 결국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 갈탄 용광로를 보면서 흐뭇하였고 출선 장면을 봤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산업혁신체제 연구 : 철강 및 공작기계산업 중심으로|저널=북한대학원대학교|성=석사|이름=강영실|url=|날짜=2015|출판사=|쪽=p. 148 - 158}}</ref>
 
2016년에는 이때부터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추진하여 성공을 시킨 산소열법 용광로를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기 시작하여 2017년 부터 공사에 들어갔었고 이때 황해제철련합기업소에 사용하던 설비들을 대부분 활용하여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였다.
 
2018년 1월 1일 완공이 되어 첫 출선이 되는데 성공을 하고 출선을 한 용선이 품질이 좋은 용선이 되어 나오자 모두가 기뻐하였고 품질이 좋은 용선으로 변했으며 연산 규모는 30만 톤의 수준으로 추정을 할 수 있고 특히 황해제철련합기업소의 1.6배 더 많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80926031900014|제목=北, 김책제철소에 코크스 안 쓰는 '주체철' 생산공정 완공 보도|성=김효정|날짜=2018-09-26|언어=ko|확인날짜=2020-05-27}}</ref>
 
=== 전자 공학 ===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는 게 전자 공학 부문 특히 [[반도체]] 사업이며 특히 반도체 공학은 1983년부터 준비하여 [[평양직할시|평양]]과 [[성천군|성천]] 그리고 은정지구를 기준으로 반도체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특히 [[김정일]]과 [[김정은]]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것도 반도체 장비에 투자를 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알아본다면 [[리철호가사업하는기계공장|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집적회로공장|89호 집적회로 공장]], [[평양집적회로공장|평양 집적회로 공장]], [[평양집적회로시험공장|평양 집적회로 시험 공장]], [[Glocom]], [[111호마스크제작소|111호 마스크 제작소]]에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제프리 루이스 박사와 [[통일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가 나와 현재 반도체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특히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부분 군수 공장에 납품이 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901188015Y|제목=美전문가 "김정은 시찰공장 중 미사일 개발 관련 6곳 위치 특정"|성=연합뉴스|이름=|날짜=2019-01-18|웹사이트=한국경제|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그리고 [[하태경]] 의원도 현재 일본이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플루오린화 수소|불화수소]]와 그외의 장비를 납품하고 있고 특히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스스로도 전자빔 리소그래피 장비를 공급받았다고 인정을 하였다.<ref>MEBES-4700S 위상 반전 마스크 제작하기 위한 노광 기술 - 국가과학원 111호 마스크 제작소, 2004.08.05</ref><ref>{{웹 인용|url=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1/2019071100731.html|제목=하태경 日,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 대북 밀수출 30건, 안전정보센터 자료 공개|성=기자|이름=김민우|날짜=2019-07-11|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 [[조선중앙통신사|조선중앙통신]]과 [[내나라 (웹사이트)|내나라]]에서도 [[단일 칩 체제|SoC]] 제작에 성공하였다고 보도 하였으며 한술더떠 로동신문에서는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저전력 '''LP'''형 '''HKMG''' 개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공하였다고 보도하였고 이를 김정은이 축하문을 [[111호마스크제작소|111호 마스크 제작소]] 과학자들에게 직접 송부하였다고 밝혔다.<ref>로동신문, 2017.06.20</ref><ref>로동신문, 2017.07.01</ref>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도체 개발 공정 과정을 거치자면 2014년에는 20nm 공정를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2017년에는 '''LP'''형 '''HKMG'''를 개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19년]]에는 10nm [[핀펫|FinFET]] 공정을 개발하여 역시 파운드리하여 입증을 하는데 성공하였다.<ref>조선중앙통신, 2014.12.29</ref><ref>내나라, 2017.01.16, 2019.03.18</ref><ref>조선중앙통신, 2019.10.30</ref> {{위키인용집|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속담}}
 
=== 자체 네트워크 개발 ===
1997년 EC계열의 통신망을 자체 개발하여 광명이라는 명칭의 인터넷 프로토콜 통신망을 개발하여 [[점대점 프로토콜]] 방식으로 추진을 하였다.
 
하지만 전화 통신망의 포화로 인하여 2000년대 전국적인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독자적인 인트라넷 망을 갖게 되었으며 [[200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까지 광케이블 공사가 부설이 완료가 되었고 특히 리 기준과 가정집에는 56Kbps 수준의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되어 있었고, [[201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 - 면 - 리 기준으로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완료가 되었고 가정집에서는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ADSL]]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완료가 되었다.
 
현재 광명망 서비스 중에서는 [[메일]] 서비스와 [[전자 게시판]] 서비스, [[채팅]] 서비스,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추진을 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유흥을 즐기기 위한 서비스를 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었고 한때는 자체로 게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2008년 중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집트의 [[오라스콤 그룹|오라스콤]]과 이동통신 계약을 하게 되면서 오라스콤이 광명망을 활용하며 디지털 이동통신망을 구축하였고 지방 지사를 연결해 관리하게 되었다.
 
오라스콤에서 휴대폰을 이용한 [[무선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WAP]]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망을 개인이 이용하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광명망 내에 개설된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면 홈페이지의 관리자나 감독 기관에서 글을 검열한 후에 게시하는 방식의 제한이 생기게 되었다.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고속 패킷 접속|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고속 패킷 접속|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에게 판매를 하였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7/08/photos-reveal-north-koreas-new-portable-intranet-devices/|제목=Photos reveal North Korea's new portable intranet devices|성=|이름=|날짜=2017-08-10|웹사이트=|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 여기에 저장되어 있는 과학기술문헌 중 총 8,600여만 건이 광명망에 수록이 되어 있으며 발명특허는 3,600만 건이 광명에 수록된 과학기술문헌은 4,500만 건이 수록이 되어 있다.
 
이중에 10% 이상은 [[반도체]]와 [[컴퓨터 과학]] 문헌이며 이 기술 문헌들을 유료화 하여 반도체 연구와 소프트웨어 연구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설정을 하였다.
 
특히 이 과학기술문헌의 대부분은 [[조선콤퓨터중심|조선컴퓨터센터]]에서 대부분 외국 사이트에 자체 자산으로 구입하여 대부분 소장을 한 것으로 그만큼 과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zoCLIlVu33A|제목=중앙과학기술통보사를 찾아서|성=조선신보|이름=|날짜=2013-04-07|웹사이트=youtube|출판사=|확인날짜=2020-05-30}}</ref>
 
=== 소프트웨어 기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년대 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이미 전폭적으로 시작하여 [[하드웨어]]는 군수 전용 개발 부문으로 [[소프트웨어]]는 민수 전용 개발로 돌려 개발을 하였다.
 
특히 자체 네트워크 개발은 물론 특히 스마트폰의 게임이나 혹은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발하거나 혹은 복제하여 [[평양타치]] 스마트폰이나 [[아리랑 121]] 스마트폰에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현재는 자체 [[앱 스토어]]인 나의 길동무 4,1이나 혹은 자료봉사 2,0을 개발하여 [[미국]]의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UEFA 유로파리그]] 혹은 게임 엔진 계열인 [[카운터-스트라이크|카운터 스트라이크]] 계열도 개발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5347.html|제목=평양 거리에도 ‘스몸비’…북 400만~500만명이 셀카·채팅|성=기자|이름=김지은|날짜=2019-03-11|웹사이트=한겨레|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ref>{{웹 인용|url=http://www.nk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9|제목=북한판 앱스토어 자료봉사 2.0의 모습은?|성=기자|이름=강진규|날짜=2019-03-12|웹사이트=NK 경제|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8/02/yankee-mopping-up-operation-shooting-game-popular-in-north-korea-state-media/|제목="Yankee mopping-up operation" shooting game popular in N. Korea: online outlet|성=|이름=|날짜=2018-02-05|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현재는 많은 국가 특히 [[중국]]이나 혹은 [[미국]] 등지에서도 소프트웨어 기술을 합작 개발하여 많은 수익 사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작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작한 경우가 많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1630516|제목=남북 합작 애니메이션 '왕후 심청' 광복 60돌에 남북 동시 개봉 예정|성=기자|이름=정형모|날짜=2005-07-07|웹사이트=중앙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5-27}}</ref>
 
== 평가 ==
 
=== 문화 개방 과정 ===
[[2013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류경 (스마트폰)|류경 스마트폰]]을 판매를 하기 시작하여 [[광명망]]으로 서비스를 하기 시작을 하였고 특히 데이터 서비스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사|조선중앙통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하여 놓았으며 특히 '''만방''' 동영상 서비스로 인하여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kr.nknews.org/%eb%8b%a8%eb%8f%85-%eb%b6%81%ed%95%9c-3g-%ed%9c%b4%eb%8c%80%ed%8f%b0-%eb%8d%b0%ec%9d%b4%ed%84%b0%ec%9a%94%ea%b8%88%ec%a0%9c-%ec%b2%ab-%ea%b3%b5%ea%b0%9c/|제목=북한 3G 휴대폰 데이터요금제 첫 공개|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6-11-21|웹사이트=NK news|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특히 서비스 문물 개방 과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2016년 부터 [[만수대 텔레비죤|만수대 TV]]를 [[케이블 텔레비전|케이블 TV]]로 전격 송출하여 [[UEFA 유로파리그]]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시청할 수 있도록 전격 조치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MYH20160518000600038|제목="북한, 외국인 전용 만수대TV 모든 주민에 개방"|성=기자|이름=이영현|날짜=2016-05-18|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만수대 TV'''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인 [[목란비데오|목란비디오]]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DVD]]로 발매하여 판매를 하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news1.kr/articles/?3042889|제목='北 평양시내 영상물 판매소서 美 애니메이션도 판매중'|성=기자|이름=양새롬|날짜=2017-07-08|웹사이트=뉴스1|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28hbXI9cpY|제목=Buy DVD in Pyongyang - North Korea|성=Jaka Parker|이름=|날짜=2016-05-10|웹사이트=Youtube|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2016년]]에는 아예 [[스마트폰]]으로 [[목란비데오|목란비디오]]로 들어가서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안드로이드]]로 설치하여 위의 영화들을 볼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허용을 하였음을 알수가 있고 이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고 단, 역시 그외의 영화들을 볼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ws_indepth/newsindepth-07242019145343.html|제목=“북, 도발 카드로 미국에 양보 압박 중”|성=기자|이름=박정우|날짜=2019-07-24|웹사이트=자유아시아방송|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ref>{{웹 인용|url=https://areena.yle.fi/1-3462510|제목=Video of surfing on Kwangmyong|성=Yle Areena|이름=|날짜=2016-05-14|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07-11}}</ref>
 
[[2018년]]에는 많은 주민들이 최근 살기 힘들다고 말은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만수대 텔레비죤|만수대 TV]] 설치에 극성이다면서 지역 우체국에서는 핀잔을 주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외국 영화에 대한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당국도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결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주민들의 외부 정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650元으로-외국영화-시청-北-만수대통로-설치-허가/|제목=650元으로 외국영화 시청 北, 만수대통로 설치 허가|성=기자|이름=강미진|날짜=2018-03-09|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더군다나 '''나의 길동무''' [[앱 스토어]]를 통하여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지되었던 외국 도서들까지 대부분 허용하여 구매할 시 구독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었고 이를 '''김흥광''' 대표가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ws_indepth/cellphonesp-05212019110822.html|제목=사회변혁 촉진 비밀병기|성=기자|이름=노정민|날짜=2019-05-21|웹사이트=자유아시아방송|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2015년 1월 들어서는 광명망의 개인 이용이 다시 허용되었다고 알려졌음을 알수가 있고 특히 그리하여 북한은 가정집에도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ADSL]] 모뎀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615559|제목=대북매체 "한국 뮤직비디오, 北 젊은층서 유행"|성=기자|이름=홍지영|날짜=2016-06-08|웹사이트=SBS 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아예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고속 패킷 접속|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고속 패킷 접속|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에게 판매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7/08/photos-reveal-north-koreas-new-portable-intranet-devices/|제목=Photos reveal North Korea's new portable intranet devices|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7-08-10|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바일 [[1인칭 슈팅 게임|FPS]] 게임이 유명하여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게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는 것이고 특히 [[카운터-스트라이크|카운터 스트라이크]]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nknews.org/2018/02/yankee-mopping-up-operation-shooting-game-popular-in-north-korea-state-media/|제목=Yankee mopping-up operation" shooting game popular in N. Korea: online outlet|성=기자|이름=정다민|날짜=2018-02-05|웹사이트=NK News|출판사=|언어=en-US|확인날짜=2020-07-11}}</ref>
 
더군다나 스포츠 게임이 유명하여 [[UEFA 유로파리그|유로파리그]] 선수나 혹은 국가 대표팀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그래픽도 상당히 좋다.<ref>{{웹 인용|url=http://www.s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63|제목=北, 제재속에서도 첨단정보기술 제품 개발 계속...3D프린트-얼굴인식기-티머니 등 출시|성=대기자|이름=안윤석|날짜=2019-11-18|웹사이트=서울평양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2015년에는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옥류가 처음으로 개관하여 처음으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대략 30개의 온라인 쇼핑 사이트가 생겼다.<ref>{{웹 인용|url=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7/2018112700297.html|제목=평양은 온라인 쇼핑 열풍 … 치킨 배달도 한다|성=기자|이름=김명성|날짜=2018-11-27|웹사이트=조선일보|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 부정부패 현상의 심화 ===
사회적으로 부정부패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암시장 거래에 필요한 공공물자의 횡령이 심하고 그 종류도 다양하며 로동당 - 정부 고위직 관료들의 횡령은 공적 사업비를 불법 지출하거나, 자기 산하 행정 및 경제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행정 및 경제관료들은 당정관료들의 후원을 받는 것이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는 데 유리하다는 인식 때문에 부패 개입에 주저하지 않는다.
 
행정 관료는 물자를 직접 관리하는 과정에서 직접 횡령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협동농장에서 간부들이 담합하여 쌀과 같은 주곡을 빼내거나, 유통 분야에 관여하는 관료가 배급품이나 각종 자재를 빼돌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도 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뇌물은 모든 계층에 만연되어 있으며 기업소 또는 관공서 등의 직장 내에서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일탈 행위에 대한 묵인 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특혜를 얻기 위해 상하위직간에 광범위한 뇌물수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좋은 직장에 배치받기 위해 주택 취득, 대학 입학, 노동당 가입, 여행 허가 취득을 위해 뇌물을 주고 받는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부패는 궁극적으로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횡령과 횡령된 물품의 암거래는 북한을 고루 못사는 사회가 아닌, 신분에 따라 빈부격차가 큰 사회로 만들며, 사적 영역이 공적영역을 지속적으로 잠식함으로써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을 증대시킬 것이다.<ref>{{저널 인용|제목=북한 경제개혁의 실태와 전망에 관한 연구|저널=통일연구원|성=연구위원|이름=김영윤|url=|날짜=2006-12|출판사=|쪽=p. 130 - 131}}</ref>
 
=== 사실상 전세계 공산주의의 붕괴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은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
 
[[201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1211148200504|제목=北, 시장사회주의 초입 제재가 체제변화동력 약화할 수도|성=기자|이름=이준삼|날짜=2019-12-11|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정은]]이 밝혔다시피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 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다.<ref>{{웹 인용|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815038400504|제목=文대통령 北, 시장경제 도입 북한판 경제개혁 어디까지 왔나|성=기자|이름=류미나|날짜=2019-08-15|웹사이트=연합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7-11}}</ref>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ref>{{저널 인용|제목=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개혁 연구|저널=산업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석기|url=|날짜=2018-08|출판사=|쪽=p. 32}}</ref>
 
[[김영환 (1963년)|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는 26일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열린 개발과 인권, 인권을 위한 북한 경제개발 전략 모색 세미나에서 사회주의의 3가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계획경제와 배급,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유제가 사실상 붕괴됐다고 말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는 상당히 힘이 약해졌다.
 
'''김영환''' 대표는 이어 [[김정일]]이 이미 여러 차례 사회주의로의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한 바 있어 아버지의 실패를 경험한 김정은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포전담당책임제로 대표되는 농업개혁, 종합시장 확대를 중심으로 한 시장보호정책, 또한 자영업과 소기업 자유화 확대 등을 북한 개혁개방의 현재 수준이라고 제시하면서 지난 7 - 8년 동안의 북한의 정책에서 개혁개방의 진정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정은이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포전담당책임제는 기존 제도와 비교해 보면 개인의 자율권이 상당 부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킬 여지가 적지 않다며 실제로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농업생산량은 증대됐다는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dailynk.com/北-사회주의-완전-붕괴-김정은-개혁·개방-선택-불가/|제목=北 사회주의 완전 붕괴...김정은 개혁·개방 선택 불가피|성=기자|이름=문동희|날짜=2018-10-26|웹사이트=데일리 NK|출판사=|언어=|확인날짜=2020-07-11}}</ref>{{위키여행|en:North Kore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언어링크|en}}}}
 
== 같이 보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과사전]]
* [[고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
* [[위화도 회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검열]]
* [[조선 시대 연표]]
* [[조선의 국왕적화통일]]
* [[조선의한반도 행정 구역평화협정]]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팔도|8도]]
*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이십삼부|23부]]
* [[대북송금 문제]]
**[[십삼도|13도]]
* [[조선의 연호개인숭배]]
* [[임진왜란벼랑끝 전술]]
* [[고조선이북5도위원회]]
* [[알레한드로 페레스]]
* [[조선왕조실록]]
* [[이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란의 관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란은 2012년 9월 '과학협력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란의 미사일 기술 및 핵 무기 기술에 기여 하였다.
* [[승정원일기]]
*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 [[미국]]과 [[이란]]이 15개월 이상의 지속된 실무 핵협상을 통해, UN 이사국 5개 국가([[영국]],[[프랑스]],[[중국]],[[독일]]등)및 [[유럽연합]]의 지지를 받았던 인류 최초의 핵협정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강리도, 1402년) - 명나라의 [[대명혼일도]] 다음으로 동양에서 2번째로 오래된 세계지도로서 유럽과 아프리카도 그려져 있다
* [[동국지도 (1463년)|동국지도]](1463년)
* [[조선방역지도]](1557년~1558년)
* [[지구전후도]](1834년)
* [[대동여지도]](1861년)
* [[대한제국]]
* [[대한민국]]
 
== 각주 ==
{{위키공용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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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참고자료 ==
* {{서적 인용|제목=북한 종교정책의 변화와 종교실태|url=http://unibook.unikorea.go.kr/libeka/elec/WebBook_data4/kinu/63645.pdf|성=김병로|날짜=2002|출판사=통일연구원|isbn=9788984791527|ref=jar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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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outube.com/businessNK Foreign investment in North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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