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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통일신라||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신라 표}}
'''신라'''({{한자|新羅}},{{llang|en|Silla}})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다.
 
[[진한]]에 소속된 부족국가 중 하나인 [[경주시|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혁거세 거서간(干)]]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진한(辰韓)의 사로국에선 왕(王) 또는 수장(首長)을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 [[지증왕]] 때에 왕호(王號)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의 신라(新羅)로 정하였다. 또한 [[이사부]]에게 명해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나라|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이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하였고<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문무왕은 676년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구와 원산만 이남의 지역을 확보하였다. }}</ref> 이로써 신라는 삼국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했으며, [[신라 집사부|집사부]] 장관인 [[시중 (신라의 관직)|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교|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골품 제도#6두품|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10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삼국 시대가 발발하여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귀순하기로 하면서 56대 993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辰韓)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도 충지 잡간(匝干), 아간(阿干) 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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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쫓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ref>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뱃사람들의 은어로 동풍을 샛바람이라 하는 점 등)'이 있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니사금 편에 기술되어 있다.<ref>《삼국사기》신라본기 제 1권 탈해니사금 9년(63),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샐 무렵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니 어린 사내 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하늘이 내게 주신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이에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금빛 상자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九年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ref> 높은 땅을 뜻하는 '달'과 '서벌'이 합쳐지면 '달서벌'이 되고 '서'의 모음이 약해지면 '달스벌/달스불'이 된다. 닭(鷄)을 닥, 달 등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달스벌/달스불'을 닭+수풀, 즉 계림(鷄林)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ref>{{서적 인용|url=|제목=놀부와 노리코|성=최규성|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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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story of Korea-Inter-country Age-830 CE.gif|250px|섬네일|오른쪽|서기 [[830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통일신라]]
 
[[67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것을 말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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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신라는 [[67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 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말갈]]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나라|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 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또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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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
[[파일:9주 5소경.png|섬네일|왼쪽|250px|9주 5소경]]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ref><한국의 전통예술> (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편집부 저 ) 304p</ref>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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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을 비롯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 후삼국의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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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서 고려로 ===
호족 출신이자 신라의 장군이었던 [[고려 태조]]는 [[후고구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하였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면 그 [[종실]]은 엎어지고 그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ref>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논</ref>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ref>[http://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00602/28785354/1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ref>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ref>[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7/02/75397/ 신라 경순왕, 나라를 버려 나라를 얻다] 매일경제 [[2017년]]</ref>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태자]]와 [[김덕지|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ref>《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 《동사찬요(東史纂要)》오운(吳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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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거서간]]은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ref>[[김부식]](1145), 《[[:s:삼국사기|삼국사기]]》 〈[[:s:삼국사기/권제1|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 (17년(서기전 41)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ref>
 
신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에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토지와 노비는 왕토사상에 기반하여 국왕에 종속되었으나, 전쟁 포로를 관직을 겸한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하사하거나, 군공을 세운 자에게 토지와 농민을 식읍(食邑)·사전(賜田)으로 주었다. 또한, 고위 관료는 녹읍을 지급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를 받을 뿐 아니라, 주민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하사받았다.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이후에는 조세 제도를 마련하였다. 재산에 따라 [[호]](戶)를 상·중·하로 나누어 곡물과 [[포]](布),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업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왕궁, 성, 저수지 수축에 필요한 노동력은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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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경기도 화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이라는 해적소탕 기지이자 무역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ref>필리핀 재외한국문화원 - 역사 - '남북국 시대:[[통일신라]]와 [[발해]]'편</ref>
 
[[신문왕]]은 [[68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고,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722년]]([[성덕왕]] 21)에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다만 관료전은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약해진 757년에는 녹읍이 부활하고,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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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하였다. 대신 신라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하였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이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때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민족]]의 언어로 유용하게 쓰였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세공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의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에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아주 발달했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대왕과 진성대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또한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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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Silla-Cheonmado-01.jpg|천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