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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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 =[[가미쓰케노키미 와카코]]<br />[[아베노 히라후]]<br />[[풍왕]]
|병력1 = 당군 17,000명<br />당 함선 170여척<br />신라군 병력 규모 불명<br />
|병력2 = 왜군 442,2000명000명<br />왜 함선 800척<br />백제군 병력 규모 불명<br />
|사상자1 = 불명<br />
|사상자2 = 함선 400척 난파<br />왜군 10,000명 사망<br />말 1,000필 손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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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 전투'''(白江戰鬪, {{llang|zh|白江口之战}}{{해석|백강구 전투}}, {{llang|ja|白村江の戦い}}{{해석|백촌강 전투}})는 [[663년]] 8월에 신라의 백강(현재의 [[금강]] 하구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나라|당]]·[[신라]]의 연합군이 벌인 전투이다. 당·신라 연합군의 대승으로승리로 끝났다. 중국의 통일왕조 [[당나라|당]]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며 일어났던 전쟁이며, 왜국의 참패로 인해 왜국의 국방·정치제제의 변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백제 부흥군이부흥운동이 전멸하는실패하는 등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 배경 ==
[[581년]]에 건국된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위기를 느낀 고구려는 왜국과의 강화를 모색하면서 승려 [[혜자]]를 왜국에 파견하는 관계 개선에 나섰고,나섰다. 한편 [[양견|문제]]・[[양제]]의 치세에 4번에 걸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세력이 약화된 수나라는 [[618년]]에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가 628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당 태종]]・[[당 고종]]은 고구려를 644년~648년에 걸쳐 공략했지만 실패하였다.
 
627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때는 당이 내전 중이어서 원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백제가 당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선덕여왕]](632년~647년)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를 통해 친당 정책을 펼쳤고, [[654년]]에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양국 관계는 더 친밀해졌다. [[648년]]부터 신라와 당의 사이에 백제 공격이 논의되고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5/진덕왕|본기 권5 진덕왕]] |인용문=二年...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南扶餘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 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2년(648년)...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백성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ref> 한편, [[649년]] 신라에서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도 활발해졌다. 당시 왜국에서 나카노오에(훗날 [[덴지 천황]])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五|卷第廿五 孝德天皇]] |인용문=三年...冬十月...新羅遣上臣大阿飡金春秋等、送博士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來獻孔雀一隻・鸚鵡一隻。仍以春秋爲質。春秋美姿顏善談笑。<!--번역: 3년 겨울 10월, 신라는 고위급 관리인 대아찬 김춘추 등을 보냈다. 박사 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를 보내 공작 한쌍과 앵무새 한쌍을 바쳤다. 김춘추는 인질이 되었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하였다.-->}}</ref> 백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왜를왜국을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백제와 왜국을 갈라 놓으려는 신라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으면서 친백제 세력이 친신라보다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해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당과 백제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ref>당시 왜의 외교 정책은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다는 설과, 고토쿠 천황 중심의 친백제 세력과 나카노오에 황자 중심의 친신라 세력로 나뉘어 있었다는 설, 거꾸로 고토쿠 천황이 친신라 세력이었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친백제였다는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ref> 또한 신라의 급속한 발전이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세련된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五|卷第廿五 孝德天皇]] |인용문=二年春三月...是歲、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着唐國服、泊于筑紫。朝庭惡恣移俗、訶嘖追還。于時、巨勢大臣、奏請之曰、方今不伐新羅、於後必當有悔。其伐之狀、不須舉力。}}</ref>
 
660년 음력 8월 29일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당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하에 두었지만, 곧 유민들이 투쟁하였다.
 
== 전쟁의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