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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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2 = 왜군 42,000명<br />왜 함선 800척<br />백제군 병력 규모 불명<br />
|사상자1 = 불명<br />
|사상자2 = 함선 400척 난파손실<br />왜군 10,000명 사망<br />말 1,000필 손실<br />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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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왜국은 부흥운동에 원조를 실시했는데,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元年春正月辛卯朔丁巳。賜南扶餘佐平鬼室福信失十萬隻。絲五百斤。綿一千斤。布一千端。韋一千張。稻種三千斛。三月庚寅朔癸巳。賜南扶餘王布三百端。}}</ref> 왜국이 '남부여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가 661년 12월에 있었던 당의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다(《일본서기》)<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十二月。高麗言。惟十二月。於高麗國寒極泪凍。故唐軍雲車衝■。鼓鉦吼然。高麗士率膽勇雄壯。故更取唐二壘。唯有二塞。亦備夜取之計。唐兵抱膝而哭。鋭鈍力竭而不能拔。噬臍之耻非此而何。釋道顯云。言春秋之志正于高麗。而先聲百濟。々々近侵甚。苦急。故爾也}}</ref> 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662년 1월, [[연개소문]]의 군대가 [[평양]] 근교에서 당군 10만을 격퇴하고, 2월에는 군량이 떨어져 평양 근교에 고립되어 있던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경내까지 들어온 신라의 군량지원을 받아 간신히 퇴각한 것을 의식하여, '고구려와 함께 벌이는 전쟁이라면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부흥군 지원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부여풍의 싸움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곧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문무대왕]]이 이끄는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과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왜군이, 수륙협공으로 [[신라]]의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막았고, 해상에서는 왜선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나당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완패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부여풍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도주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남부여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깨끗하게완전히 궤멸되었다.
 
== 영향 ==
귀실복신의 죽음과 내분이 겹치고, 왜병마저 당의 수군에게 궤멸되면서 결국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끝났다. 결국 부흥군 지휘부와 백제 유민들은 왜국으로 망명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나라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호례성에 가서 왜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고 입을 모았다.
 
왜는 백제 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왜의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정치에 반영하여 중앙집권화에 이용하려 했는데, 덴지 천황 때에 책정된 오오미령(近江令)부터 덴무 천황 때에는 왜국 최초의 율령법으로 여겨지는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의 제정이 이루어지면서 율령국가의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이호 율령]]([[701년]])의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의 건설은 일단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왜국 내부의 위기감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일본이라는 율령국가 수립의 한 토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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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설·속설 ==
7세기까지 규슈 북부에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왕조가 있었다는 후루타 타케히코(古田武彦) 등의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說)에 따르면,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운 왜의 정체는 사실 기나이 정권이 아니라 다자이후(大宰府)를 수도로 삼고 있던 규슈 왕조의 군사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사료 비판과 같은 역사학의 기본적인 절차조차 밟지 않은 학설이라며 "학설로서 비판이나 검증을 받을 가치도 못 된다" 하여 무시되고 있다. 일본의 주요 학술 잡지에서 이러한 '규슈 왕조설'를 긍정적으로 채택한 학술 논문은 하나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규슈 왕조를 언급하는 주장은 과학적인신빙성 있는 학설로 취급되지 못한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