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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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gunhyeon Early CE 3rd Century.png|right|섬네일|200px|3세기 초 삼한의 형세]]
'''삼한'''(三韓)은 [[삼국 시대]] 이전 [[한반도]] 중부 및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진한]](辰韓), [[변한]](弁韓), [[마한]](馬韓)을 통칭하는 말로,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성립하였던 [[진국|진]](辰)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후
한편 [[삼국시대]] 후기부터 삼한이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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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 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원전
일찍이 삼한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부족(目支部族)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목지국은 마한 54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 그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북방 [[부여]]와[[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백제]](伯濟)국의 [[예맥족]]이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건국 당시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 [[신라]])가 경주평야의 6촌(六村)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금속문화를 수용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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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 [[우거왕]](右渠王)
== 정치 ==
마한의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국|목지]](目支)<ref>월지(月支)라고 한 문헌도 있음</ref>·백제(伯濟)<ref>[[경기도]] [[하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동구]]·[[송파구]] 등 [[한강]]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이와 같은 삼한 78개의 소국(小國)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 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 국가에는 우두머리인 군장(君長)이 있었는데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큰 것부터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견지(遣支)·읍차(邑借)가 있었으며, 군장의 통솔 밑에서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 산업 ==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물품매매에 돈처럼 사용되었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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