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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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gunhyeon Early CE 3rd Century.png|right|섬네일|200px|3세기 초 삼한의 형세]]
'''삼한'''(三韓)은 [[삼국 시대]] 이전 [[한반도]] 중부 및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진한]](辰韓), [[변한]](弁韓), [[마한]](馬韓)을 통칭하는 말로,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성립하였던 [[진국|진]](辰)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후 진한의[[진국|진]](辰)을 계승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 [[신라]]로, 변한의똑같이 [[진국|진]](辰)을 계승했으나 지리적으로 진한과 구별되었던 [[변한]]의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마한의중국 이주민이 세운 [[마한]]의 십제국(十濟國)이 [[백제]]가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삼한으로 통칭되는 78개의 ‘국’(國)의 성격을 두고는 여러가지 논의가 진행되어 왔는데, 대개 신지(臣智)를 정점으로 [[읍차]](邑借)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서열화되어 있는 상당한 정치수준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시대]] 후기부터 삼한이 [[신라]], [[백제고구려]], [[고구려백제]]의 삼국을 의미하는 단어로 치환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후대로도 계속 이어져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었다.
 
== 개설개요 ==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 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2세기]] 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한반도]] 지역에는중·남부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위만의 군현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특히 결과중국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이 초기 [[마한]](馬韓) 세력을 구성했고, 한반도 토착 세력이었던 [[진국|진]](辰)의 후손들이 초기 [[진한]](辰韓)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후 진한(辰韓)과 [[문화]]·[[인종]]·[[언어]]적으로 차이가 없었던 [[변한]](弁韓)이 지리적으로 진한(辰韓)과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1세기]] 경부터는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 세 그룹의 부족 사회가 생겨,확립되었다. 기원후 [[3세기]] 경에는 [[대방군]] 공격을 가하기도공격하기도 하고 직접 [[서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일찍이 삼한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부족(目支部族)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목지국은 마한 54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 그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북방 [[부여]]와[[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백제]](伯濟)국의 [[예맥족]]이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건국 당시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 [[신라]])가 경주평야의 6촌(六村)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금속문화를 수용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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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한강한반도 유역으로부터 남부 일대에 걸쳐중·남부에는 [[진국|]](辰)이라는 하나의한반도 토착 부족국가 연맹체가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심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과 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북부)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금마면 (익산시)|금마]](金馬: [[전라북도]] [[익산시]] 중부)가 초기 중심지였을 것이고, 이후 [[진국|진]](辰)의 세력이 커지면서 [[영남 지방]]추정하는이동하였다는 견해가견해도 병존한다존재한다.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한 무제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붕괴되고(기원전 108년)멸망했고, 그 땅에 한의한나라 군현이 설치됨에 따라설치되면서 한족(漢族)의 세력과 문화가 크게 흘러한반도로 들어왔다유입되었다. 이와 같은 외래의 정치적 세력과 문화는 한의 군현과 이웃한 고대 한민족(韓民族)의 여러 부족 국가 또는 부락국가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주었는데주었다. 중국에서 이주한 세력이 한반도 토착 세력을 규합하여 [[마한]](馬韓)의 초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ref>인종적으로 중국 이주민이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진(辰)을 계승하지 않고 중국 전통을 따랐다. 대부분의 고대 문헌이 마한을 진한 및 변한과는 다른 세력으로 기술했다.</ref>, 본래 한반도 토착 세력이었던 [[진국|진]](辰)의 후손들은 [[경상도]] 전역에서 [[진국|진]](辰)을 계승한 [[진한]](辰韓) 초기 세력을 이루었다. 이후 진한(辰韓)과 [[문화]]·[[인종]]·[[언어]]적으로 차이가 없었던 [[변한]](弁韓)무렵에지리적으로 이르러진한(辰韓)과 남쪽구분되기 진국은시작하면서<ref>실제로 지리적《三國志(삼국지)》나 환경에《漢書(한서)》 따라 다수의 고대 문헌이 진한과 변한을 구분하지 않았다. 《後漢書(후한서)》 등 소수의 중국 문헌만이 변한을 진한과 구분하였다.</ref>, [[한반도]] 중·남부는 크게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 삼한으로삼한(三韓)으로 나뉘었다.
 
== 정치 ==
마한의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국|목지]](目支)<ref>월지(月支)라고 한 문헌도 있음</ref>·백제(伯濟)<ref>[[경기도]] [[하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동구]]·[[송파구]] 등 [[한강]] 이남이남에 서울남동부를있었으며, 중심으로[[백제]](百濟)와는 했던다른 나라나라이다.</ref>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전체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십제]](十濟)국에 의해 마한은 [[전라도]]로 축소되었고, 진한과 변한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삼한 78개의 소국(小國)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 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 국가에는 우두머리인 군장(君長)이 있었는데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큰 것부터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견지(遣支)·읍차(邑借)가 있었으며, 군장의 통솔 밑에서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 산업 ==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전라도 지역에는특성상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행해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같다보인다. 김제(金堤)의 [[벽골지|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제|의림지]](義林池)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물품매매에 돈처럼 사용되었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