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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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 문제 ==
1937년에 모리스 라벨이 죽자, 그의 형제 에두아르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는 Montfort-l'Amaury의 집을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1954년에, 에두아르는 교통사고을 당하고, 잔느 타베른이란 간호사가 그를 간병했고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에두아르의 기사가 되었다. 1956년에 에두아르의 아내가 세상을 뜨고 타베른 부부는 [https://ko.wikipedia.org/w/%EC%83%9D%EC%9E%A5%EB%93%9C%EB%A4%BC%EC%A6%88 Saint-Jean-de-Luz[생장드뤼즈]]{{깨진 링크|url=https://ko.wikipedia.org/w/%EC%83%9D%EC%9E%A5%EB%93%9C%EB%A4%BC%EC%A6%88 }}에 있는 에두아르의 집에 살게 된다. 라벨의 동생 에두아르는 파리시에 80%의 저작권을 양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을 바꿔 잔느를 그의 유증 수혜자로 결정했다. 1960년, 에두아르가 죽고 모리스의 조카들이 유산 착복을 이유로 타베른 부부에게 소송을 걸었지만 실패한다. 1964년, 잔느가 세상을 뜨면서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볼레로의 저작권료, 3억 6천만 프랑을 상속받게된다. 이렇게 SACEM의 법률 이사이었던 쟝 자크 르모안이 사직한 후 변호사가 된 후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결탁하고 그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들은 출판사에게 매우 유리한 계약서를 개정하기 위해 모리스 라벨의 작품 계약권자인 듀랑 출판의 사장, 르네 도망쥬를 고소했다. 르네 도망쥬는 당시 80세 이었기 때문에 합의로 해결하고 결국 작품의 모든 저작권과 작품 계약서를 쟝 자크 르모안에게 양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71년에 ARIMA (국제 저작권 관리 매니지먼트)를 [https://ko.wikipedia.org/w/%EC%A7%80%EB%B8%8C%EB%A1%A4%ED%84%B0 [지브롤터]{{깨진 링크|url=https://ko.wikipedia.org/w/%EC%A7%80%EB%B8%8C%EB%A1%A4%ED%84%B0 }}]에 설립했고, 저작권 계약(앵글로색슨의 법률이지 프랑스 법률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근거로, 알렉산더는 그가 가지고 있던 저작권의 절반 이상을 ARIMA에게 양도했다. 알렉산더의 두 번째 부인의 딸, 에블린 펜 드 카스텔에 따르면, ARIMA는 모리스 라벨 작품에 대해 모든 저작권의 독점 피양도인이고 그 연간 소득은 40년 전부터 2백만 유로일 것이라고 한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