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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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는데 [[박헌영]]계열 [[조선공산당]]세력들에서는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극단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어 공산당과 [[전평]]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ref>당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월북, 해주에 있다가 소련을 방문하였다.</ref>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에 대해 맞서 발전하게 되었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79</ref>
 
== 대구지역의영남지역의 사건상황 ==
=== 대구 ===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ref name="now1001">{{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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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 오후 7시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시위가 대구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간인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경북 지역 민간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또다시 경북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194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 경상북도 ===
== 경북지역의 사건 ==
소요사태는 10월 2일 즈음 되어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주변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시위를 벌이고 소요를 일으키면서 사건은 경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영천]]에서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수, 경찰, 관리들을 살해하고는 경찰서와 우체국을 방화했다. (10월 3일) 경찰응원대가 도착해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경찰관들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사건 관련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유린했다.<ref><The origin of the Korean War>, "CIC report", 358p</ref> 이 곳 영천에서만해도 1200여호의 가옥이 전소,파괴되었고 사망 40명, 중상자 43명, 피해액 10억여원의 피해를 입었다.<ref><10월 인민항쟁 연구>, 정해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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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측의 피해 규모는 당시 지역에서의 경찰에 대한 신뢰도나 관할 경찰서장의 임기응변에 따라 크게 줄어드는(동시에 경찰의 보복도 가벼운) 경우가 많았는데, 고령군의 경우 10월 3일 오후 8시경 군민청 본부에 모인 군내 민청원 수백 명이 군청을 습격, 접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당시 고령경찰서장 최이준(崔二俊)이 직접 민청 간부와 만나 양자간 절충을 시도하고, 협상 결과에 불만을 품고 4일 오전 1시경 괭이와 낫을 들고 경찰서 공격에 나선(당시 고령경찰서에는 10월 1일의 대구에서의 소요 진압에 15명의 경관이 투입되고 그밖에 피신한 경관 몇몇을 제외하면 남은 경찰은 8명뿐이었다) 민청원과 군중들을 상대로도 최이준 서장이 다시 몸소 나서서 담판을 짓는 모습을 보였는데, 군중들 사이에서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의 알력이 벌어져 시간을 끄는 과정에서 대구로부터 지원경찰이 온다는 소식에 군중은 해산, 별다른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왕조 시대 이래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만큼 우익 및 경찰 세력도 좌익 못지 않게 강했던 [[안동]]에서는 10월 3일에 농림학교 교사 8명을 비롯, 공산주의 지도자로 지목된 30명(《대구시보》에는 82명)이 안동 및 영주 경찰에 사전 체포되면서 불상사는 예방되었다고 평가되었다.<ref>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년, 391~395쪽.</ref> 문경에서는 황시곤, 이규선 등 문경의 지방 유지들이 광복청년회 점촌지부 점촌소방대와 함께 경찰에 협조했고, 문경경찰서장이었던 조준영 경감은 문경 군민들에게 비교적 "청렴하고 참신한 인물"로 평가받아온 사람이었고 군내 좌익들의 동태를 파악해 예방조치를 강구한 덕분에 피해가 다소 적었는데, 10월 월 4일 50여 명의 군중이 군내 산양지서를 습격, 파괴하였고 경찰에 용의자 30명이 검거,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
 
=== 경상남도 ===
== 경남지역의 사건 ==
 
경남지역은 대구 10.1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9월 총파업의 전개는 매우 소극적이고 온건적이었으며 10월 사건 때에도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사건들이 펼쳐졌다.(그럼에도 많은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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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에서는 [[통영]]에서 최초의 사태가 발생했다. 4000~5000여명의 군중들이 읍내를 장악하고는 경찰을 구타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창녕]]에서도 여러 지서가 습격당하고 군중의 경찰서, 군청 점령시도가 있었다. [[마산]]에서는 6일과 7일에 거쳐서 군중과 군경 사이의 치열한 충돌로 13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었다.<ref>박헌영, '10월 인민항쟁', <박헌영노선 비판>(서울:세계,1986)</ref> [[울산]]지역에서는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경찰서가 포위당헀으나 응원경찰과 미군의 도움으로 곧 탈환되었고 군중 일부는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소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부산]]에서도 9일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 영남 이외 지역에서의 상황 ==
== 충청지역의 사건 ==
 
=== 충청도 ===
 
경상도에서 불붙은 사건은 충청도로 옮겨붙었다. 충청도에서 사건은 주로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충남에서는 17~19일을 기점으로, 충북은 10월 4일과 7일에 민간인의 소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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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에서는 비교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주]]에서 경찰 1명이 죽고, [[영동군]]에 300~400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정도였다. 충북지역에서 사건이 이렇게 미미했던 까닭은 충북의 중심지인 청주가 온건 성향의 좌익이 꽤 우세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온건세력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는 용납되지 못함"이라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으며 실제로 극단주의자를 탈퇴시키기도 했다.)<ref>정해구, <10월 인민항쟁 연구>, P169~172</ref>
 
===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의 사건 ===
 
충청도에서 사건이 가라앉으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도 소요사태가 터졌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를 불태우는 투쟁을 벌였다. 개풍에서는 경찰서장이 피살되고 대부분의 지서가 이틀에 걸쳐서 습격당했다.<ref><조선일보>, 1946년 10월 22일 <서울신문>, 1946년 10월 23일</ref> [[파주]]에서는 폭동이 계획되다가 사전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전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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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에서는 [[횡성]]에서 수천명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했고 묵호에서는 시위를 조사하던 도중 사망자가 나자 주민들이 경찰지서 등을 공격해 다수의 사망자가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도 경찰이 구타당하고 통신이 두절당했으며, [[평창]]에서는 무기를 든 좌익세력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삼척]]에서는 광산을 이유로 좌우익 간의 소요가 일어났다. 강원도의 사건은 동해안 부근에서 사건이 주로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 호남지역 ===
== 전남, 전북 지역의 사건 ==
 
남한 전역을 휩쓸 것 같았던 일련의 사태들은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약 일주일 가까이 멈추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은 좌익극단주의자들이 추수기와 군경의 쌀수집을 기다리고 있고 미군정은 쌀수집을 할 권리가 없다는 선동에 집중할 것으로 판단했다.<ref><G-2 Weekly Summary, No.59>, USAFIK</ref> 그러나 이것은 좌익이 전라도에서 일을 준비해나가는 기간이었다. 그런 이유 탓인지 특히 전남지역은 사건 초기의 경북처럼 크고 폭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