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87
번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
편집 요약 없음 |
||
[[파일:CaoZhiPortrait.jpg|섬네일|200px|조식]]
'''진사왕 조식'''(陳思王 曹植, [[192년]]
== 생애 ==
[[파일:Portrait full-length Cao Zhi.jpg|섬네일|200px|조식]]
처음에는 총명하며 문학에 재주가 많은 조식이 총애를 받았으나, 조비에 비하면 처세가 좋지 않고 음주에도 절제가 없는 모습을 보이며 수레를 타고 천자만이 다니는 길을 지나갔던 사건 때문에 후계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조식을 중심으로 커진 세력을 경계한 조조가 조식을 보좌하는 [[양수 (후한)|양수]]를 주살하자 조식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조인]]이 번성에서 [[관우]]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가 조식을 장군으로 임명해 보내려고 불렀는데, 술에 취해 이를 받들지
조비가 왕위에 오르고 나자, 양수와 함께 조식의 보좌를 맡던 세력들도 다 조비에게 죽임을 당하여 조식은 자기 봉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봉국에서 조식은 자주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의 일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관직을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고, 아내가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절망하고 근심 속에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한 일화로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식을 죽이기 위해
== 문학 세계 ==
조식의 생애는 조조가 죽은 해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前期)의 대표적인 작품인「백마편(白馬篇)」에서 조식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유협아(遊俠兒)를 노래하였는데 이는 바로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이기도 하다. 이런 강개한 지취(志趣)는 조식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 시에 나타난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 왕위를 놓고 조비와 겨루던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그와 관련된 심정을 작품에 담았다. 조비가 즉위 초 조식의 친구들을 죽일
한편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낙신부(洛神賦)」는 낙수(洛水)의 여신을 만나 연모의 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낙수의 여신이란 조비의 아내이자 그의 형수인 [[문소황후]]
== 기타 ==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해진 고향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했다.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당장 조조 사후 한 일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는데, 조비는 황제에 오른 후에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척박한 초 땅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노육]]은
== 전기 자료 ==
{{전임후임
|직책=[[후한]]의 평원후
|임기=211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봉국 폐지)
}}
{{전임후임
|직책=[[후한]]
|임기=214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봉국 폐지)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견성후
|임기=221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왕으로 승격)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견성왕
|임기=222년
|전임자=(공에서 승격)
|후임자=(4년 후) 형제 [[조림 (패목왕)|조림]]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옹구왕
|임기=223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봉국 폐지)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준의왕
|임기=227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봉국 폐지)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동아왕
|임기=229년
|전임자=(첫 봉건)
|후임자=(봉국 폐지)
{{전임후임
|직책=[[위 (삼국)|조위]]의 진왕
|임기=231년
|전임자=(6년 전) 조카 [[조옹 (한단회왕)|조옹]]
|후임자=아들 [[조지 (서진)|조지]]
[[분류:삼국지 위나라의 시인]]
[[분류:조조의 아들]]
[[분류:3세기 중국
[[분류:3세기 시인]]▼
[[분류:조위의 제후왕]]
[[분류:후한의 열후]]
|
편집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