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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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알지]]계 ===
* [[강릉 김씨]](江陵 金氏) :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예로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다.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江陵)이다.<ref>《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르기를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족자(族子) 김주원(金周元)을 옹립(擁立)하기로 하였으나, 때마침 김주원이 비에 막혀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옹립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주원은 후환이 두려워 명주(溟州)로 퇴거하여서 살았는데, [[원성왕]](元聖王)이 군왕(郡王)에 봉하였다. 일운(一云)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태종무열왕 5세손으로 아버지가 각간(角干) 김유정(金惟靖)이라 한다.</ref>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시조를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로 한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첫째 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공주 왕씨' 소생들이라는 후손들이 분파하였다. 상계(上系)는 각종 병란 및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문헌과 유적(遺蹟)이 멸실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 [[선산 김씨]](善山 金氏. 일선 김씨) :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대광(大匡)시중(侍中)에 오르고, 시호가 순충공(順忠公)이다.
*[[선산 김씨]](善山 金氏)(일선 김씨) :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고려]]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 선주백(善州伯) '''[[김선궁]]'''(金宣弓)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선산읍|선산]]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 왔다.
* [[선산 김씨]](善山 金氏. 들성 김씨) :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후예로 고려조에 벼슬이 추밀원사(樞密院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으며, 시호는 원평공(元平公)이다. 본래 경주인으로 신라(新羅) [[원성왕]](元聖王) 후손이라 한다.<ref>《고려사》에 고조부 김유렴(金庾廉)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태조(太祖)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아버지가 삼중대광(三重大匡) 김유렴(金庚濂)이라 한다.</ref>
* [[광산 김씨]](光山 金氏) :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왕자]]로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예지(叡智)하여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 (광주광역시 인근 담양군)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ref>일운(一云) 시조가 [[헌강왕]](憲康王) 왕자 또는 3남이라 한다.</ref>
* [[연안 김씨]](延安 金氏) :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신라]] [[왕자]] 후예로 [[고려 명종]](明宗) 때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였다.<ref>일설에 신라 때 왕자(王子) 형제가 있었는데, 직간(直諫)을 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형은 북빈경(北濱京)인 지금의 강릉(江陵)에 살고, 동생은 시염성(鼓鹽城)인 지금의 연안(延安)에 살았으므로, 이우 후손들이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 [[순천 김씨]](順天 金氏) : 시조 '''김총'''(金摠)은 신라 종성(宗姓.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궁예(弓裔) 때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사후(死後) 향인(鄕人)들이 순천부(順天府)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하였다. 순천(順天)의 별호를 평양(平陽)이라 한다.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시조를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로 한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첫째 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공주 왕씨' 소생들이라는소생의 후손들이 분파하였다. 상계(上系)는 각종 병란 및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문헌과 유적(遺蹟)이 멸실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평장사공파: 파조 '''김봉모'''(金鳳毛)는 [[경순왕]]의 후예로<ref>《고려사》에는 [[김알지]]의 후예라 한다.</ref> [[고려 신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정평공(靖平公) 시호를 받고 일파를 이루었다.<ref>일운 시조가 평장사 '''김태서'''(金台瑞)라 하며, 혹칭(或稱) 대안군파 파조라는 [[경순왕]]의 4자 공부시랑 '''김은열'''(金殷說)이 선계라 한다.</ref>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金仁琯)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ref>《고려사》에는 [[헌강왕]]의 후예라 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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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공파 : 파조 '''김수구'''(金壽龜)는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을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
**상호군공파 : 파조 '''김중약'''(金仲約)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ref>조선 정종의 아들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빙부(聘父)이다.</ref>
* [[강릉 김씨]](江陵 金氏) :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예로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다.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江陵)이다.<ref>《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르기를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족자(族子) 김주원(金周元)을 옹립(擁立)하기로 하였으나, 때마침 김주원이 비에 막혀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옹립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주원은 후환이 두려워 명주(溟州)로 퇴거하여서 살았는데, [[원성왕]](元聖王)이 군왕(郡王)에 봉하였다. 일운(一云)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태종무열왕 5세손으로 아버지가 각간(角干) 김유정(金惟靖)이라 한다.</ref>
* [[선산 김씨]](善山 金氏) :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대광(大匡)시중(侍中)에 오르고, 시호가 순충공(順忠公)이다.
* [[선산 김씨]](善山 金氏) :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벼슬이 추밀원사(樞密院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으며, 시호는 원평공(元平公)이다. 본래 경주인으로 신라(新羅) [[원성왕]](元聖王) 후손이라 한다.<ref>《고려사》에 고조부 김유렴(金庾廉)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태조(太祖)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아버지가 삼중대광(三重大匡) 김유렴(金庚濂)이라 한다.</ref>
* [[광산 김씨]](光山 金氏) :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왕자]]로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예지(叡智)하여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 (광주광역시 인근 담양군)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ref>일운(一云) 시조가 [[헌강왕]](憲康王) 왕자 또는 3남이라 한다.</ref>
* [[연안 김씨]](延安 金氏) :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신라]] [[왕자]] 후예로 [[고려 명종]](明宗) 때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였다.<ref>일설에 신라 때 왕자(王子) 형제가 있었는데, 직간(直諫)을 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형은 북빈경(北濱京)인 지금의 강릉(江陵)에 살고, 동생은 시염성(鼓鹽城)인 지금의 연안(延安)에 살았으므로, 이우 후손들이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 [[순천 김씨]](順天 金氏) : 시조 '''김총'''(金摠)은 신라 종성(宗姓.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궁예(弓裔) 때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사후(死後) 향인(鄕人)들이 순천부(順天府)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하였다. 순천(順天)의 별호를 평양(平陽)이라 한다.
 
==== [[경순왕]]계 ====
* [[울산 김씨]](蔚山 金氏) :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왕자로,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마의태자|태자]]와 함께 [[금강산|개골산]]에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졌다.<ref>학성(鶴城)은 [[울산]]의 별호라 한다. 이름은 사기(史記)에 전하지 않으나, 《하서 [[김인후]] 가장》·《김씨 분관록》·《증보문헌비고》등에 언급되어 있다.</ref>
* [[의성 김씨]](義城 金氏) : 초기 족보에 시조 '''김용비'''(金龍庇)는 [[경순왕]]의 후예로,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내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의성군|의성]]의 고호가 문소(聞韶)인 관계로 혹칭 '''문소 김씨'''(聞韶 金氏)라고도 한다. 동생 수사공(守司空) '''김용필'''(金龍弼)도 분파하였다.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후손들이 [[경순왕]]의 제5자라는 '''김석'''(金錫)을 시조를 소원(遡源) 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ref>경신보 간행 때 선계를 『경순왕-석-일-홍술-국-경진-언미-습광-공우-용비』(錫-逸-弘術-國-景珍-彦美-襲光-公瑀-龍庇)로 연결되는 8대를 소원(遡源) 시키고 올바르게 연결 했는지 모르겠다며 잘못이 없는지 두렵다고 하였다.</ref> <ref>시조 김석(金錫)에 대해서도 경순왕 4자설과 5자설이 있으며,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등에는 경순왕의 4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세보(世譜)인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신라김씨분파연원도》등에는 5자로 기록되어 있다.</ref>
* [[언양 김씨]](彦陽 金氏) : 초기 족보에 시조 '''김수'''(金壽)는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신호위 별장 동정(同正 別將)을 역임했다. 이후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후손들이 [[경순왕]]의 제7자라는 '''김선'''(金鐥)을 시조를 소원(遡源) 시켰다. 그는 그는[[고려 태조]]의 외손(外孫)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 [[삼척 김씨]](三陟 金氏) : 초기 족보에 시조 '''김위'''(金偉)는 [[경순왕]] 후예로, 고려조에 지양주사(知襄州事)를 역임했다.<ref>《씨족원류》·《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도 시조가 지양주사 '''김위'''(金偉)라 한다.</ref> 일설에 시조가 [[경순왕]] 손자 '''김위옹'''(金渭翁)으로 [[고려]]조 삼한벽상공신으로 실직군왕에 봉해지고 실직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실직(悉直)은 [[삼척군|삼척]](三陟)의 고호라 한다.<ref>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후손들이 [[경순왕]]의 제8자라는 '''김추'''(金錘)를 시조로 소원(遡源) 시켰다. 그는 [[고려]]조에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다고 한다.</ref>
* [[나주 김씨]](羅州 金氏) :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사정(司正)을 지냈다.<ref>일설에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나주군나주군에 봉해졌다고 한다.</ref> 후손 '''김대경'''(羅州君金臺卿)이 [[나주시|안로현]](나주의 고호)에 봉해졌다고유배되면서부터 한다후손들이 [[나주시|나주]에 세거하게 되었다.<ref>《조선씨족통보》에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는 [[경순왕]]의 계자(막내 아들)로 역사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데, 나라가 망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가 죽었다고 한다.</ref> <ref>최근 들어 일부 후손들이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인 [[경순왕]]의 계자(막내 아들)가아들이 [[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제2자 '''굉'''(鍠)(개명 '''황'''(湟))과 동일인이라 한다. 그러나 묘지명 원문에는 2자 '''김굉'''(개명 '''김황''')과 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조에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를 성북 십리 밖 오룡산 남쪽 삼십리 주변을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ref>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 시조 '''김일긍'''(金日兢)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태사대광(太師大匡)을 지냈다.<ref>일운 김일긍의 아버지 김숙승(金叔承)이 시조라 한다.</ref> 《김씨 분관록》에는 시조를 '''[[김방경]]'''(金方慶)이라 한다. 그는 고려 조에 [[삼별초]] 난을 평정하여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지고 [[안동시|안동]](安東)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충렬공(忠烈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혹칭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 [[수원 김씨]]((水原 金氏) : 시조 '''김품언'''(金稟言)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져 [[수원시|수원]](水原)으로 분적하였다. 수성은[[수원시|수원]]의 고호라 한다. 《김씨 분관록》에는 시조가 '''김변'''(金忭)이라 하며 그는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져 수원으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 [[김녕 김씨]](金寧 金氏)) :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져 관향을 [[김녕 김씨|금녕]](金寧)로 하여 일파를 이루었다. [[조선 고종]] 때 왕명으로 관향을 [[김해]]에서 [[김녕 김씨|김녕]](金寧)으로 개칭하였다.
* [[상산 김씨]](商山 金氏) : 시조 '''김수'''(金需)는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보윤(甫尹)을 지내고 상산으로 이적하였다. 상산은 [[상주시|상주]]의 고호다. 혹칭 '''상주 김씨'''(尙州 金氏)라 한다.
* [[부안 김씨]](扶安 金氏) : 시조 '''김경수'''(金景修)는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호장 동정(戶長 同正)을 역임하였다.<ref>아들 김춘(金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ref> <ref>5세손 [[김구 (고려)|김구]](金坵)는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태보(太保)에 오르고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으로 서원에 배향되었다.</ref> 상계는 문헌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일부 후손들이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경순왕]]의 제1자라는 '''김일'''(金鎰)을 시조로 소원(遡源) 시키고, 그가 [[경순왕]]의 [[마의태자|태자]](속칭 [[마의태자]])와 동일인이라 하며, 상계를 『일-기로-희보-경수』(鎰-箕輅-希寶-景修)로 하였으며 신라김씨들의 대표 단체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의 입장도 같다.<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위키백과:출처 필요|출처 필요]]</span>&#93;</sup></span> 시조가 경순왕의 태자이나 이름은 알 수 없다는 이견도 있다. 혹칭 [[부령 김씨]](扶寧 金氏)라고도 한다.
 
== 가야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