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아리노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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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월 24일]] 일본의 주화공사(駐華公使)였던 모리 아리노리는 당시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인 [[이홍장]](李鴻章)을 만나서 [[조선]] 문제에 관한 회담을 하였다. 회담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관한 화제가 나왔는데 서로 상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논쟁이 있었다. 모리 아리노리가 “서양의 학문은 아주 유용한데 중국의 학문은 7할이 구식이라 3할밖에 취할 바가 없다”고 하자 [[이홍장]]은 “귀국의 거사([[메이지 유신]])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나 이전의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모방하는 일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일본 의복의 서구화를 언급했다. 이에 모리 아리노리는 “옛날 의복은 넓고 편해서 무사안일한 사람에게 적당하지 근면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천년전 우리 조상이 중국의 의복이 가진 우수한 점을 보고 받아들였다면 현재는 서양의 장점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홍장은 “옛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따르는 것은 독립정신을 포기하고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공격하자 모리 아리노리는 “외압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일축했다.<ref>王曉秋 (신승하 옮김), 《근대중국과 일본》, 고려대학교 출판부, 99~102면.</ref>
 
1889년 2월 12일 [[일본 제국 헌법]]이 선포된 날 [[국수주의자]]인 니시노 분타로에게 단도로 옆구리를 찔려 다음날 사망했다. <ref>服部敏良『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吉川弘文館、2010年)311頁</ref> 니시노 분타로의 살해 동기는 모리 아리노리가 [[이세 신궁]] 방문 당시 불경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ref>{{서적 인용|제목=Smith 1997, 87–88 쪽|성=|이름=|날짜=|판=|출판사=|쪽=|장=}}</ref> 또한 니시노 분타로가 쓴 종이에는 '천황을 받드는 일본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려고 한다' 고 적혀있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