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크 다라고 왕자 (140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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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칼라타유드|사망일=1445년 6월 15일 (45세)|출생지=|출생일=1400년 3월 6일|본명=|어머니=레오노르}}
'''아라곤의 엔리케'''(1400년 – 1445년 6월 15일)는 초대 비예나 공작, 4대 알부르케르케 백작, 암푸리아스 백작,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장<ref name="sdh"/>이었다. 아버지 페르난도가 카스티야의 어린 국왕 후안 2세(1405~1454)의 숙부 자격으로 섭정을 하다가 1412년 아라곤의 국왕으로 선출되어 카스티야를 떠났다. 부친과 달리 카스티야 궁정에 남았으며, 이후 국왕 후안 2세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알바로 데 루나(1388~1453)]]와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잠시 카스티야 정계에 복귀했었으나 다시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사촌동생이자 처남인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으며 1445년 카스티야 국왕군과 벌어진 올레도 전투에서 패하며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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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는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이고 어머니는 3대 알부르케르케 백작인 레오노르이다.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1세인 아버지는 본래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재위1379~1390)의 차남이었다. 형이자 국왕인 엔리케 3세가 1406년 27세 나이로 사망하여 한살의 어린 나이로 조카 후안 2세가 즉위하자 숙부의 자격으로 섭정이 되어 형수인 캐서린과 분점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국정을 책임졌다.<ref name="sdh"/>
그러던 중 [[마르틴 (아라곤)|아라곤의 마르틴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한 후 1412년에 아라곤의 국왕으로 선출되어 카스티야를 떠나 아라곤에서 즉위하였다. 엔리케는 부모님이 물려준 주요 영지가 카스티야에 있었고<ref name="sdh"/> 카스티야에 넓은 인맥도<ref name="sdh"/> 가지고 있었으므로 카스티야 궁궐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카스티야를 떠난 이후에는 후안 2세의 모후 캐서린이 단독으로 섭정을 하였고 이때부터 궁정 내에서 [[알바로 데 루나|알바로 데 루나(1388~1453)]]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 형제관계 ===
엔리케는 셋째 아들이었으며 그의 형 알폰소는 1416년에 아버지 페르난도 1세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국왕 알폰소 5세가 되었다. 1421년 자식이 없었던 [[조반나 2세 디 나폴리|조반나 2세]] 여왕이 알폰소 5세를 [[나폴리 왕국]]의 후계자로 지명하자 알폰소 5세는 [[나폴리]]로 가서<ref>Armstrong, Edward (1964). "The Papacy and Naples in the Fifteenth Century". In Previte-Orton, C.W.; Brooke, Z.N. (eds.) p164.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VIII.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ref>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1443년 2월 26일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였다.<ref>Bisson, T.N. (1991).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Oxford University Press. p144</ref> 이후 나폴리는 자신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물려주었다.
둘째형 [[추안 2세|후안 2세(1398~1479)]]는 1420년에 나바르의 블랑쉬(수리아 2세)와 혼인하여 여왕의 남편 자격으로 나바르의 명예왕(''[[:en:Jure_uxoris|Jure uxoris]]'')'''''<ref>Black, H. C. (1968), Law Dictionary (4th ed.), citing Blackstone, Commentaries, 3, p. 210.....라틴어이며 뜻은 혼인으로 인해 그의 부인으로 부터 주어진 남편으로서의 합법적인 권리를 뜻한다.</ref>'''''이 되었다. 같은해 [[알바로 데 루나|알바로 데 루나(1388~1453)]]를 상대로한 권력투쟁에 동생인 엔리케와 함께 참여했었다.<ref name="sdh">송동훈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p128</ref> 1458년 형 알폰소 5세가 후계없이 사망하자 아라곤, 시칠리아를 물려받아 후안 2세로 즉위하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도 2세의 아버지로 이사벨 1세와 아들의 비밀 결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ref> Edwards,John. The Spain of the Catholic Monarchs 1474–1520. Blackwell Publishers Inc, 2000, pp. 10,13–14</ref>
=== 성장기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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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
1418년 11월, 엔리케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누나이자 사촌인 캐서린(1403~1439)과 결혼했다. 엔리케의 형인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는 캐서린의 언니 마리아(1401~1458)와 결혼하고, 엔리케의 여동생 마리아(1403-1445)는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2세(1405~1454)와 결혼하는등 두 왕가 집안은 서로 겹사돈을 맺고 있었다. 왕의 누이와의 결혼을 통해 엔리케의 카스티야 왕궁내의 영향력은 증가했으며 카스티야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알바로 데 루나(1388~1453)]]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 권력투쟁 ==
1420년, 엔리케는 친형 후안(훗날 아라곤 왕 후안 2세, 1398~1479)과 함께 다른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1405~1454)가 거주하고 있는 성을 포위하였다.<ref name="sdh"/> [[알바로 데
1427년 [[알바로 데 루나|재상
어머니 레오노르가 1435년 엔리케에게 앨버커키 백작위를 유산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앨버커키 백작이 된 엔리케는 귀족들의 봉기 후인 1438년에 마지막으로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안 2세(처남)와의 갈등으로 야기된 봉기와 무력 충돌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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