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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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재 [[체코]]공화국 [[보헤미아]] [[프라하]]
|결과=프로이센의 [[피로스의 승리]]
|교전국1=[[그림파일:Flag of Prussia (1750).gif|22px]][[프로이센]]
|교전국2=[[그림파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22px]][[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지휘관1=[[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지휘관2=[[로트링겐 공 카를 알렉산더|로트링겐의 카를]]<br>[[막시밀리안 율리시즈 라이치그라프 폰 브라운|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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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그림파일:Battle of Prague, 6 May 1757 - Attempted envelopment.gif|thumb|250px|right|프로이센군의 포위기동.]]
프리드리히는 즉각적인 돌격명령을 내렸으나 슈베린은 프리드리히에게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에 정찰부대를 보내자고 설득하였다. 정찰대는 근교의 완만한 녹색 초원지대를 둘러보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을 공격할 기회라고 보고하였다. 프로이센군은 약 오전 7시경 진군하였고, 약 오전 10시 경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까지 성공적으로 공격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야전 사령관 폰 브라운은 6개의 보병 연대를 보내 동남쪽의 거점을 장악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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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보병대는 프로이센군의 혼란상황을 알아채고 프로이센군을 경사지에서 몰아내기 시작했으나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던 부대와 여전히 북쪽을 향해 있던 나머지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빈틈이 벌어졌다. 이때 폰 브라운은 프로이센 보병대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프라하로 실려 갔다. 폰 브라운은 이 상처로 인해 며칠 후 사망한다.
 
[[그림파일:Battle of Prague, 6 May 1757 - Penetration.gif|thumb|250px|right|프로이센군의 돌파.]]
 
프리드리히 대왕과 [[한스 요아힘 폰 자이튼|폰 자이튼]](von Zieten) 장군이 오스트리아에 다시 공격을 가하기 위해 남쪽에서 프로이센군을 집결시키는 동안 [[히우트카르모이 군주 하인리히 카를 루트비히 드 에로|하우트카르모이]](Hautcharmoy) 장군과 베베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벌려진 틈새를 알아차렸고, 이 사이에 프로이센 보병대를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군 소속의 크로아티아 인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이 위치한 북쪽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벌어진 틈에 프로이센군은 꾸준히 공격을 감행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여 타보르 산의 서쪽 끝자락에 새로운 전열을 구성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