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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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칸딘스키'''({{llang|ru|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андинский}}, [[1866년]] [[12월 16일]]~ [[1944년]] [[12월 13일]])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art theorist)이다예술이론가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 (예술)|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그 작품은 1910년에 그려진 수채화로서 무제이나 그 그림 뒤에 추상수채화라는 문구가 있다. 몇몇의 역사가나 예술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구성VII(1913)의 스케치와 비슷하다는 구실로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작자로서의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해 이 수채화의 날짜를 앞당겨 쓴 것이라고 추측했다.
 
== 생애 ==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University of Dorpat) 교수가대학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school of Anton Ažbe)와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에서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Paris파리 근교 [[뇌이쉬르센]]({{llang|fr|Neuilly-sur-Seine에서Seine}}에서 사망하였다.
 
== 업적 및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