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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성 ==
《[[삼국지]]》, 《[[후한서]]》 및 《후한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한은진한 사람들은 중국 [[진나라|진]](秦)에서나라의 한반도로팽창 옮겨온중에 반도로 피난온 [[춘추전국]]의 유민인데유민들인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경주 [[사로국]](斯盧國) 6촌의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은 바둑판형 고인돌, 독무덤 등의 토착 계통과 함께 [[고조선]] 계통이 함께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한반도 토착 세력이었던 진(辰)과 고조선 계통의 종족이 융화된 고대 부족 국가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ref>천관우, 〈진·변한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20, 1976</ref> 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후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복속되며 신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