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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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정책 ===
[[File파일:Tornese Andronicus II.jpg|섬네일|300px|왼쪽|[[안드로니코스 2세]]의 비잔티움 제국 화폐의 가치를 저하시킨 것은 아버지, 아들, 손자와의 공동 통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단독 통치와 함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개의 다른 동전을 채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연합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는데, 이 조치는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군대의 대폭적인 감축을 명령했고,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해군을 효과적으로 해산시켰다.<ref name="Cyril260"/> 그 결과, 제국 전역의 세금 감면이 가능했고,<ref name="Cyril260"/> 비잔티움 제국의 상대적 대처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면서 그에게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en:Hyperpyron|하피르피론]] 화폐<ref name="Cyril260"/>를 강등하고 [[:en:Pronoia|프로노이아]]의 군사 엘리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비잔티움의 군사력을 더욱 떨어뜨렸다. 이런 것들이 미하일 8세가 아들에게 남긴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을 회복하려는 아버지의 시도를 풀어냈다. 미하일 8세는 제국 밖의 문제를 다루려고 시도했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버지의 통치에서 비롯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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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정책 ===
[[File파일:1328 Mediterranean Sea.PNG|섬네일|400px|오른쪽|안드로니코스 3세 집권 초기 비잔티움 제국.]]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진정한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시도는 거의 결실을 맺을 뻔했지만, 비잔티움의 많은 적대적인 국가들은 결국 쇠퇴하는 제국에 희생을 치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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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1341-1347 ===
{{본문|비잔티움 내전 (1341년~1347년)}}
요안니스 5세는 즉위 당시 10세로, 어머니 안나 황후, 요안니스 6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요한 14세)로 구성된 섭정에 의해 인도되었다.<ref name="Cyril265"/>
 
야심가 [[:en:Alexios Apokaukos|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도움을 받은 총대주교는 요안니스 5세의 통치가 요안니스 6세의 야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황후를 설득하면서 내분을 촉발시켰다. 1341년 9월, 요안니스 6세가 트라키아에 있는 동안 요한 14세는 자신을 섭정이라고 선언하고 요안니스 6세와 그의 지지자, 가족을 대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ref name="Cyril265"/>
10월에 안나 황후는 요안니스 6세에게 그의 지휘권들 포기하라고 명령했다.<ref name="Cyril266">Mango, p. 266</ref>
요안니스 6세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 14세로부터 요안니스 5세의 통치를 지키기 위한것으로 알려진 [[디디모티호]]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했다. 요안니스 6세가 황제가 되길 바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총대주교의 도발적인 행동은 요안니스 6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도록 부추기고 내전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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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안니스 6세의 치세와 몰락, 1347–1357 ===
[[File파일:Johannes V 1742.jpg|섬네일|300px|왼쪽|요안니스 5세와 그의 공동 황제겸 지도자인 요안니스 6세의 공존을 보여주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전]]
요안니스 6세는 매튜 칸타쿠지노스라는 아들을 두었고, 두 사람이 나이가 들고 독립적이게 될수록 요안니스 5세와 매튜 칸타쿠지노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희망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요안니스 5세는 요안니스 6세의 딸과 혼인하여, 두 가문을 묶기 위한 움직임으로<ref name="Cyril267"/> 그의 사위가 되었지만, 그것은 실패할 운명이였다.
 
1353년, 요안니스 6세는 여전히 평화가 유지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그 해에 요안니스 5세가 매튜 칸타쿠지노스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여,<ref name="Cyril267"/> 내전을 재점화시켰다. 요안니스 5세는 강등되어 아직 비잔티움 지배하에 있는 [[에게해]]의 몇 안되는 섬 중 하나인 테네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요안니스 6세는 그의 아들 매튜 칸타쿠지노스를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1354년 오스만 튀르크군은 그의 지지로 트라키아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같은 해 11월 요안니스 5세는 [[제노바 공화국]]의 원조로 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요안니스 6세는 이제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1383년 죽을 때까지 회고록과 생각을 쓰곤 했다.<ref name="Cyril268">Mango, p. 26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