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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咸鏡道)는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이다. 철령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관북 지방]]'''(關北地方)이라고도 한다. 함경남북도의 최대의 도시는 [[함흥시|함흥]]이다.
 
==역사==
=== 상고와 고대 ===
원래 이 지역은 [[고조선|조선]](朝鮮)이 개천(開天)할 당시에도 그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었다. 후기 조선에 이르러 조선의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약해지자, [[한민족|한족(韓族)예맥]]의 하나인 [[동예|예]]맥(濊貊)의 일파가 [[함경남도]]의 [[함흥]] 부근에 거주했는데, 이 부족연맹체를 [[옥저|옥저국(沃沮國)]] 세웠다한다. 이후에 옥저가옥저는 북옥저(北沃沮)와 동옥저(東沃沮)로 나뉘어나뉘었으나 다스리다가모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에멸망하자 이 항복하자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었다. 이후에 고구려 부흥운동의 선두 주자였던되었으나 [[발해 고왕|천통제(天統帝)]] [[발해]]를 개국하면서 수복되었으며그 영역으로 들어갔으며, 발해의 5경 중에 하나인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직속으로속하게 있게 된다되었다.
 
== 중세= 고려(中世高麗)와 외세(外勢) ===
발해가 [[요나라|거란족]]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동단국]]이 지배했다가, 거주민들의 반발과 정치적동단국은 역량이 미숙하여 동단국은요동으로 철퇴하였다. 이로써 함경도는 200여년 간 무주지의 신세로무주지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함경도의 남부 지방은 [[고려 태조|태조]]의 북진정책으로 말미암아 함흥 평야 일원까지 회복하였다회복되었다.
 
12C에 성립된 [[금나라|여진족]]은 [[고려]]의 [[천리장성]]의 남북을 오가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자 고려의 중앙 정부는 이를 방조할 수 없다고 여기고, [[윤관 (고려 군인)|윤관]]에게 별무반을 통솔하게 하여 여진족을 토벌시켰다.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한 직후에 동북9성을동북 9성을 축조하여 여진족을 제어하여, 함경도 일대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여진의 간곡한맹약과 요청(고려를관리 부모의비용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으로문제로 인하여인해, 9성에서 철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안타깝게도 [[발해|발해(渤海)]]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약 500여 년간 함경도 대부분의 강역(疆域)이 이민족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그 함경도를 이민족 치하에 넣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민족을 크게 3개의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고종|고종]] 22년([[1234년]])부터 개시된 [[몽골 제국]]의 침입하였다. 1258년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원나라에 투항했다. [[고려 원종|원종]] 12년([[1270년]])에 고려 정부는 원에게 투항하였다.
=== 동단국(東丹國) 시기 ===
발해가 [[요나라|거란족]]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에 일시적으로 [[동단국]]이 지배했다가, 거주민들의 반발과 정치적 역량이 미숙하여 동단국은 철퇴하였다. 이로써 함경도는 200여년 간 무주지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함경도의 남부 지방은 [[고려 태조|태조]]의 북진정책으로 말미암아 함흥 평야 일원까지 회복하였다.
 
[[공민왕|공민왕(恭愍王)]]은 배원(排元)의 기치를 내세우며 옛 영토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쌍성총관부를 폐지시키고, 아울러 함경도의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이성계]]와 그의 생부인 [[이자춘]](李子春)은 쌍성총관부 소복 과정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했으며, 훗날 이성계는 [[조선]]을 수립하게 된다.
=== 여진 ===
 
=== 여진조선 ===
12C에 성립된 [[금나라|여진족]]은 [[고려]]의 [[천리장성]]의 남북을 오가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자 고려의 중앙 정부는 이를 방조할 수 없다고 여기고, [[윤관 (고려 군인)|윤관]]에게 별무반을 통솔하게 하여 여진족을 토벌시켰다.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한 직후에 동북9성을 축조하여 여진족을 제어하여, 함경도 일대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간곡한 요청(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으로 인하여, 9성에서 철수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회령군|회령부]]사(會寧府使)였던 [[이시애]]가 부친상으로 관직에서 사퇴한 이후에,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함경도 백성들과 유생들의 열화에 힘입어서 반역을 계획하게 된다. 여진족까지 동원했던 이시애가 패주하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관군에 의해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당시에 함길도였던 함경도를 2개의 도로 분할되었다. 이로 인하여, [[함흥시|함흥부]](咸興府)]]가 함흥군(咸興郡)으로 격하되었고, 감영이 [[영흥군]](永興郡)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함길도의 이름은 승격된 영흥부(永興府)와 [[안변군|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두자를 따서 영안도로 바뀌게 된다. 이 이름은 [[조선 중종|중종]] 4년([[1509년]])에 함경도의 이름으로 개정될 때까지 유지된다.
 
건양 원년(元年建陽, [[1896년]])에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가 분리되었다. 한편, [[광무]] 6년([[1902년]])에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이범윤]]을 임명하고 간도지역을 함경북도에 포함시켜, 그를 북간도 지역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서간도와 북간도(즉, 남만주)의북간도의 한국민들을 보호하였다. 그러다가 [[융희]] 3년([[1909년]])에 [[청나라|청 제국(淸帝國)]]과 [[대한제국|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을 강탈해 간 [[일본 제국|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소위, [[간도협약|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말미암아 간도는 함경북도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이런 상황은 당금에 이르고관할에서 있다이탈하였다.
=== 공민왕과 쌍성총관부 ===
[[고려 고종|고종]] 22년([[1234년]])부터 개시된 [[몽골 제국|원구(元寇)]]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고려 원종|원종]] 12년([[1270년]])에 고려 정부는 원구들에게 투항하였으며, 충성의 대가로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를 헌상해야만 했다. 이러한 치욕적인 상황에서 [[공민왕|공민왕(恭愍王)]]은 배원(排元)의 기치를 내세우며 옛 영토를 수복하는 위업(偉業)을 이루려는 계획을 착수하게 되는데, 쌍성총관부 제거는 물론이거니와 함경도의 절반 이상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 현대 ===
참고로, [[이성계]]와 그의 생부인 [[이자춘|이자춘(李子春)]]의 본거지로서 [[조선]]을 수립하는 세력 기반의 역할을 하였다.
독립 이후에 발생한 [[한국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1954년]] 10월에 [[량강도|양강도]](兩江道)]]가 신설되었다. 이후, 양강도는 함경남도가 관할하던, [[백두산]] 이남 지역의 [[개마고원|부전고원(赴戰高原)]]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에 함경북도는 [[1993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북조선]]의 자유경제구인 나진선봉시의 성립과 더불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94년]], 나진선봉시가 나진선봉특급시(羅先特級市)로 격상되면서 함경북도의 관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 옛 이름 ==
== 근대조선(近代朝鮮)과 한말(韓末) ==
예로부터 조선(소위,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국토였으며영토였으며, 고려대고려(高麗)에는대에는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하였고못하여 [[만주족|여진족]] 등의 이민족에북방 민족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북방 개척으로 말미암아 조선대조선(朝鮮)대에 이르러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 변천은 아래와 같다.
 
* 영길도(永吉道, [[조선 태조]] ~ [[1416년]])
=== 이시애(李施愛)의 난 ===
* 함길도(咸吉道, [[조선 태종|태종]] 17년([[1416년]]) ~ [[1470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회령군|회령부]]사(會寧府使)였던 [[이시애]]가 부친상으로 관직에서 사퇴한 이후에,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함경도 백성들과 유생들의 열화에 힘입어서 반역을 계획하게 된다. 여진족까지 동원했던 이시애가 패주하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관군에 의해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당시에 함길도였던 함경도를 2개의 도로 분할되었다. 이로 인하여, [[함흥시|함흥부(咸興府)]]가 함흥군(咸興郡)으로 격하되었고, 감영이 [[영흥군]](永興郡)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함길도의 이름은 승격된 영흥부(永興府)와 [[안변군|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두자를 따서 영안도로 바뀌게 된다. 이 이름은 [[조선 중종|중종]] 4년([[1509년]])에 함경도의 이름으로 개정될 때까지 유지된다.
* 영안도(永安道, [[조선 세조|세조]] 16년([[1470년]]) ~ [[1509년]])
 
* 함경도(咸鏡道, [[조선 중종|중종]] 4년([[1509년]]) ~ 현재)
=== 건양(建陽)연간과 대한제국 ===
건양 원년(元年, [[1896년]])에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가 분리되었다. 한편, [[광무]] 6년([[1902년]])에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이범윤]]을 임명하고 간도지역을 함경북도에 포함시켜, 그를 북간도 지역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서간도와 북간도(즉, 남만주)의 한국민들을 보호하였다. 그러다가 [[융희]] 3년([[1909년]])에 [[청나라|청 제국(淸帝國)]]과 [[대한제국|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을 강탈해 간 [[일본 제국|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소위, [[간도협약|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말미암아 함경북도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이런 상황은 당금에 이르고 있다.
 
== 나선(羅先)과 현대 ==
독립 이후에 발생한 [[한국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1954년]] 10월에 [[량강도|양강도(兩江道)]]가 신설되었다. 이후, 양강도는 함경남도가 관할하던, [[백두산]] 이남 지역의 [[개마고원|부전고원(赴戰高原)]]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에 함경북도는 [[1993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자유경제구인 나진선봉시의 성립과 더불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94년]], 나진선봉시가 나진선봉특급시(羅先特級市)로 격상되면서 함경북도의 관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 삼각권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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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삼각권역은 [[함경북도]] [[청진시]]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연변]]의 [[옌지|연길시(延吉市)]], [[러시아 연방|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이어서 나오는 삼각형의 내부이다.
 
== 옛 이름 ==
예로부터 조선(소위,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국토였으며, 고려대(高麗代)에는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하였고 [[만주족|여진족]] 등의 이민족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북방 개척으로 말미암아 조선대(朝鮮代)에 이르러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 변천은 아래와 같다.
 
* 영길도(永吉道, [[조선 태조]] ~ [[1416년]])
* 함길도(咸吉道, [[조선 태종|태종]] 17년([[1416년]]) ~ [[1470년]])
* 영안도(永安道, [[조선 세조|세조]] 16년([[1470년]]) ~ [[1509년]])
* 함경도(咸鏡道, [[조선 중종|중종]] 4년([[1509년]]) ~ 현재)
 
==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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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도시 ===
* [[함흥시]] - [[조선]]을 건국한 후에 감영이 설치된다. 이후, 관북의 최대 도시로 성장.
 
* [[원산시]] - 원산은 안변의 근처에 있는 도시로서, [[이성계]]의 선조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이 도시는 [[1880년]], [[1876년]]에 폭압적인 시위에 의하여 체결된 [[강화도 조약]]에 의거해 개항되었다.(개항 이유 : [[일본 제국]]의 제정 러시아에의 견제) 이로써 도시는 급성장을 하게 되었고, 이는 [[경원선]]의 개통으로 더욱 가속되었다.
* [[함흥시]] - 고려의 [[고려 태조|천수제(天授帝)]]가 북진정책을 전개할 때, 함흥만까지 영토를 탈환한 이후로 개발된 도시. 옛 [[옥저|옥저국(沃沮國)]]의 도읍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몽골 제국|몽고]]의 침략으로 인하여, 임시적으로 몽고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 때에 [[전주 이씨]]의 별종인 [[이자춘]]이 세력을 양성한 이후에 그의 아들이 [[조선]]을 건국한 후에 감영이 설치된다. 이후, 관북의 최대 도시로 성장.
* [[나선특급시|나선시]] - 20세기 후반 [[북조선]]이 이곳을 경제적으로 개방하였다.
 
* [[원산시]] - 원산은 안변의 근처에 있는 도시로서, [[이성계]]의 선조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이 도시는 [[1880년]], [[1876년]]에 폭압적인 시위에 의하여 체결된 [[강화도 조약]]에 의거해 개항되었다.(개항 이유 : [[일본 제국]]의 제정 러시아에의 견제) 이로써 도시는 급성장을 하게 되었고, 이는 [[경원선]]의 개통으로 더욱 가속되었다.
 
* [[나선특급시|나선시]] - 원래 나진과 선봉은 [[청나라]]과 접경을 하고 있었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인하여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연해주]]로 남하하면서, 조선의 [[녹둔도]]를 강점하게 되었고, [[조선|조]][[러시아 제국|로]](朝露)간에 국경을 하게 된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북조선]]의 김씨 정권이 이곳을 경제적으로 개방하였다.
 
== 전적지(戰跡地)와 관광 산업 ==
 
== 더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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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시]]
* [[량강도]]
 
 
[[분류:한국의 행정 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