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8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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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8세는 [[루이 11세]]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샤를은 유년기를 그의 아버지가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앙부아즈 성]]에서 지냈다. 루이 11세는 [[1483년]]에 사망하였고, 샤를 8세는 겨우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지만 국가를 경영해 나갈 능력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1492년]]까지는 그의 누나인 [[안 드 보주]]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491년]] 샤를 8세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약혼하였던 [[안 드 브르타뉴|브로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하였다. [[1492년]], 당시 샤를 8세가 22살일 때 그가 총애하던 신하인 [[에티엔 드 베스]]의 조언에 따라 누나 안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권력을 차지하자, 샤를 8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나폴리 왕국]]의 [[앙주 왕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였고. 이를 빌미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대포]]가 유럽의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물질문명과 자본주의Ⅰ-2 일상생활의 구조 下 | 저자= [[페르낭 브로델]] |기타 = 주경철 옮김 |연도= 1995 |출판사=까치 |위치=서울 |장=제6장 기술의 보급: 혁명과 지체 |쪽= 549|id={{ISBN|=89-7291-084-8}} |인용문= 대포가 유럽의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 것은 1494년 9월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에서였다. }}</ref> 결국 [[1495년]] [[2월 22일]] [[프랑스]]군은 [[나폴리]]에 입성하고 샤를 8세는 [[5월 12일]] 나폴리의 왕 '''카를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밀라노 공국|밀라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러한 프랑스군의 약진에 위협을 느끼고,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반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결국에는 동맹군이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여 샤를은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은 이탈리아 원정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의 빚이 너무 많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498년]] [[4월 7일]] 샤를 8세는 [[앙부아즈 성]]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유행하였던 테니스와 유사한 [[죄드폼]] 경기를 보러가던 중 문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고, 다시 경기를 보러 가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9시간 뒤 사망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40117768|제목=Tennis : a cultural history|성=1939-|이름=Gillmeister, Heiner,|날짜=1998|출판사=New York University Press|위치=Washington Square, N.Y.|isbn=081473121X}}</ref> 샤를의 아이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왕위는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루이 12세|오를레앙 공작 루이]] ([[루이 1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