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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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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시게타로는 [[1883년]], [[에도 막부]]의 신하이자 신관이었던 시마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중학을 거쳐 [[1904년]]에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 [[1905년]] [[5월]] 말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순양함 "이즈미"에 올라타 정찰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5년]]에 일본 해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 소좌로 승진되었다. 그 후에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였고, 주로 군령부에 재적해 군령부 총장의 신임을 얻었다.
 
[[1923년]]에 일본 해군대학교 교관, [[1928년]]에 "다마"와 "히에이"의 함정을 거쳐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상하이 사변]] 때에는 제3함대 참모장으로 [[상하이]]에 출동하였고, 그 후에는 군령부 제3반장, 제1반장, 군령부령 개정 후에는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제3 함대 참모장으로 샹하이에 출동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 방면 함대 사령관과 동시에 해군 대장이 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도조 내각에서 해군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2월]], [[도조 히데키]] 수상 겸 육상의 참모 총장 겸임에 맞추어 군령부 총장을 겸임했지만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같은 해 6월에 있었던 [[필리핀 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도조 히데키와 아울러 큰 비판을 받았다. 7월에는 해군 장관, 8월에는 군령부 총장을 사임하였고, 후에 군사 참의관을 거쳐 [[1945년 1월]]에 예비역이 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A급 전범으로 지명돼, 헌병이 신병 구속을 위해 자택에 방문했을 때는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당당한 태도로 연행되어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일본제국 해군|일본 해군]]에 있어서 전쟁 수행의 최고 책임자로서책임자로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예상이 지배적<ref> 실제로 판사들의 투표에서도 11명중 5명이 사형에 찬성하였다.</ref>이었으나, [[1948년]] [[11월 12일]]에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1955년]], 가석방 후에 사면돼 [[1976년]]에 사망하였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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