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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상, 공장이라 함은 건축물 또는 공작물, 물품제조공정을 형성하는 기계·장치 등 제조시설과 그 부대시설(이하 "제조시설등"이라 한다)을 갖추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제조업을 하기 위한 사업장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동법 제3조 제1호)
 
== 조선시대 ==
조선조의 공장은 관영(官營) 공업의 범주에 속하여 경공장(京工匠:중앙)과 외공장(外工匠:지방)을 설치, 예속된 장인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중앙과 지방 관부(官府)의 공업적 수요를 충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공장을 보유하는 중앙의 관아(官衙)로는 공조(工曹)·봉상시(奉常寺)를 비롯하여 30여 개의 관사가 있었으며, 모두 작업을 할 수 있는 수공업장을 가지고 있었다(129種 2,841人). 이에 대하여 각 도·부(府)·읍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은 경기 153, 충청 564, 경상 1,129, 전라 775, 강원 225, 황해 221, 영안(永安:지금의 함경남북도 지방) 180, 평안 214로서 장인은 모두 3,361명이었으며, 종별은 약 27종이었다. 외공장에서 제작하는 수공품의 종류가 적었던 것은 경공장에 제공되는 원료품·반제품 외에는 지방 관아 및 일반 민수(民需)에 꼭 필요한 것만 제작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고려시대와는 달리 관영공업에 소속된 장인은 원칙적으로 노예적 노동급부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영공업의 책임을 완수하면 이른바 자기경영(自己經營)에 종사할 수 있었다. 즉, 공역(公役)의 의무를 담당하는 외에 자기경영을 하는 대신 이에 대해서 국가는 공장세(工匠稅)를 징수함으로써 장인은 자유로운 독립수공업자로서 생산분야를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이것은 노동급부양식의 퇴조현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장인은 자기경영에 종사, 국가의 공업적 수요는 장인세·시장교환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장인의 생산·판매는 독점적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 고려시대 ==
본래 수공업에 종사하던 공인(工人 또는 匠人)은 고려·조선조에 수공업자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세습제로서 정부직영하에 각종 수공업장(手工業場)이 설치되어, 여기서 정부 감독하에 각종 물품을 제작, 국가의 수요를 충당했다. 이 관영공장(官營工匠)을 지휘·감독하는 관서로는 ① 토목·건축을 담당하는 선공장(繕工匠), ② 각종 병기(兵器) 제작을 담당하는 병기시(兵器寺), ③ 각종 장신구의 제작을 관리하는 공조서(供造署), ④ 금은 세공품 제작을 관리하는 장야서(掌冶暑), ⑤ 세공 잡품(雜品)의 제작을 담당하는 도교서(都校暑), ⑥ 각종 염료(染料)의 제조와 염색작업을 담당하는 도렴서(都染署), ⑦ 직물 제조를 담당하는 잡직서(雜織署), ⑧ 궁정의 특수견직물 수요를 담당하는 액정국(掖庭局), ⑨ 왕실 어용(御用)의 거마를 장리(掌理), 각종 마구(馬具)·차바퀴 제조를 담당하는 봉거서(奉車署) 등이 있었다. 위의 각 관서에는 관인이 배치되어 국가의 수요에 따라 물품을 제작케 했는데, 물품제작을 맡는 장인들의 기술적 지도체제로서 지유승지(指諭承旨)·행수대장(行首大匠) 등의 계층이 있어 물품제작의 기술면을 지휘·감독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제작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조직되던 신라시대의 조직과는 달리 국가의 용도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노동급부조직(勞動給付組織)에 있어서도 노예적 노동급부에 의존하던 신라시대와는 달라 고려시대 장인의 노동 급부는 임노동적(賃勞動的) 성격을 띠었다.
 
== 같이 보기 ==
* [[비용 공학]]([[:en:Cost engine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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