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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아우스 그리고 [[살로니아 마티디아|마티디아]]와 함께, 비탄에 잠긴 미망인 플로티나는 [[셀레우키아 피에르시아|셀레우키아]]로 향하는 트라야누스의 시신과 같이 동행했고 로마로 향하는 그의 유해와 동행했다.
 
플로티나의 가장 잘 기록된 행적들이 일어난 것은 미망인이었을 때였다. 121년 동안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속주들을 시찰하고 있는 동안, 플로티나와 그는 누가 [[아테네]]의 [[에피쿠로스학파]]의 수장이 되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여러 문서들에 관여했었다. 그녀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수장 역할을 하던 [[포필리우스 테오티무스]]가 실제 수장이 되도록 하게 끔하는 법의 개정 요청을 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하드리아누스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관련 문서들이 연속된 비문들에 보존되었다. Freisenbruch는 “문헌 기록속에 그녀의 수동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아테네의 이 비문은 플로티나를 한때 리비아가 누렸던 황제에 대한 일종의 접근권을 갖고, 자신의 본심에 가까운 동기를 위해 활동적이었던 고도로 교육받은 여성으로 재탄생시켰다”라며 언급했다.<ref>Freisenbruch, ''Caesars’ Wives'', pp. 163f</ref>
 
플로티나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녀는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신격화]]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프로방스]]의 [[님 (프랑스)|님]]에 그녀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