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주요 참전 전투/전쟁= [[주필산 전투]]
|}}
'''고혜진'''(高惠眞, ? ~ ?)은 [[고구려]] 말의 무장이다. [[여당 전쟁]] 때 남부 욕살로서 [[고연수]]와 함께 15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에 패하고 투항하였다.
 
== 생애 ==
=== 대군을 이끌고 ===
[[645년]] [[당 태종]]의 군대가 [[고구려]]의 여러 [[성 (건축)|성]]을 정복하고 [[안시성]]까지 진군하였다. [[연개소문]]은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에게 고구려와 [[말갈]]의 혼성 병력 15만 명을 주어 안시를 구원하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대로(對盧) [[고정의]]가 이들에게 이르기를 "당“당 태종은 안으로는 군웅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굴복시켜 [[황제]]에 오른 자로 [[세상]]을 구할 만한 인재이다. 지금 [[당나라]]의 군사들에게 대적할 수는 없다. 일단 싸우지 말고 여러 [[날]]을 대치만 하면서 별동대로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만 못하다.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고 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를 듣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을 40[[리]] 앞두었다. 태종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阿史那社尒)에게 [[돌궐]]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거짓으로 패하여 고구려군을 유인하라 하였다. 고연수 등이 이에 속아 안시성 동남방 8리되는 곳까지 추격해서는 [[산]]을 의지해 진쳤다. 그 [[길이]]가 40리에 이르렀므로 태종도 자못 긴장하였다.
21번째 줄:
 
=== 당나라 편에서 ===
[[안시성주안시성]]주는 안시성에서 [[안시성 전투|오래도록 농성]]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얼른 큰 업적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식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가족]]을 아끼는 마음에 자진하여 싸우기 때문에 바로 공략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는 10여만 명을 거느리고도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는 허물어졌으며, 고구려 사람들의 간담도 작아졌습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노쇠하여 수비가 건실하지 못합니다. 군대를 그곳으로 돌린다면 아침에 도착하여 [[저녁]]이면 뚫을 것이며 도중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궤주할 것입니다. 그렇게 물자와 양식을 노획하고 북을 치며 전진한다면 평양도 틀림없이 함락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많은 장수들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장손무기가 ‘[[건안성]](建安城)과 [[신성 (요동)|신성]]을 배후에 둔 채 친격하면 친정군이 만전을 기할 수 없다’며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 끝내 [[겨울]]이 오면서 보급이 곤란해진 태종은 철군하였다. 고연수는 도중에 죽고 고혜진은 [[장안]]까지 따라갔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 관련 작품 ==
36번째 줄:
[[분류:고구려의 군인]]
[[분류:한국의 장군]]
[[분류:여당전쟁여당 전쟁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