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하 (190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 생애 ==
[[1930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1930년 4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조선일보]] 기자, [[1933년]] 10월부터 [[1940년]] 8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41년]] 2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잡지 《춘추》(春秋)의 저작 겸 발행인을 역임했고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역임했다. 1941년 12월 27일 주식회사 조선춘추사(朝鮮春秋社)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6월 잡지 《춘추》에 지원병 제도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글인 〈조선인과 바다〉를 기고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 통치 정책을 지지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언론/출판 부문,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위원장 임시서리]]를 역임했으며 [[1945년]] [[10월 5일]] 《신조선보》(新朝鮮報) 주간, [[1946년]] [[2월 26일]] 《한성일보》(漢城日報) 편집 겸 발행인,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문경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7일]]에 납북되었다.<ref>[http://www.kwari.org/sub2a_info.php?num=246120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 양재하]</ref> [[1956년]] 7월 납북된 대한민국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단체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