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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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 우의정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락원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 김수항이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賜死)되자 경기 포천에 은거했다.〈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도(道)를 행하는 데 힘썼으며, 부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며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1696년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서연관(書筵官)에 선발되고, 1703년 종부시 주부(主簿), 1705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 1715년 사헌부 지평(持平), 1719 사헌부 장령(掌令), 1721년 사헌부 집의(執義), 1721년 9월 영조가 세제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1721년 신축년~1722년 임인년)로 맏형 김창집이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성주 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 등에 제향되었다. 현대의 유명 방송인 [[김구라]]이단상(본명 김현동李端相)의 직계문인으로 10대조이다.저서로 이단상〈낙치설(李端相落齒說) 문인으로 저서로〈갈역잡영(葛驛雜詠)〉 〈삼연집(三淵集)〉·〈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현대 유명 방송인 [[김구라]](본명 김현동)의 직계 10대조이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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