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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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An Jung-sik Baek-agchunhyo (Summer).jpg|섬네일|오른쪽|250px|[[백악춘효]](白岳春曉) 여름본, 여름의 백악산([[북악산]])과 경복궁을 그린 [[안중식]]의 작품이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조선 태조|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 (역사)|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서울의 사회·문화#경복궁]]〉</ref><ref name="글로벌2">《[[글로벌세계대백과]]》, 〈왕권의 재확립과 쇄국책〉, 경복궁.</ref>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309009_002&tabid=k 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ref name="yi37">이상해, 2004, p.37.</ref>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ref name="yi39">이상해, 2004, p.39.</ref>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5">김동욱, 1998, p.15.</ref>잉기메링
 
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5">김동욱, 1998, p.15.</ref>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ref name="글로벌2" /><ref>[[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ref>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ref name="yi39"/><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409029_006&tabid=k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ref>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ref name="kimdw17">김동욱, 1998, p.17.</ref>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7" />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ref name="kimdw15"/>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ref name="kimdw15"/>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5"/><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1507021_002&tabid=k 세종 61권 15년 7월 21일]</ref>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ref>김동욱, 1998, p.16.</ref>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ref name="글로벌2" /><ref>[[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ref>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ref name="yi39">이상해, 2004, p.39.</ref><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409029_006&tabid=k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ref>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ref name="kimdw17">김동욱, 1998, p.17.</ref>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7" />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ref name="kimdw15" />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ref name="kimdw15" />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ref name="kimdw15" /><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1507021_002&tabid=k 세종 61권 15년 7월 21일]</ref>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ref>김동욱, 1998, p.16.</ref>
 
경복궁은 태종, [[조선 세종|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조선 태종|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ref name="yi39"/>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조선 세종|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ref name="글로벌2" />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ref>{{웹 인용 |url=https://weekly.donga.com/3/all/11/70201/1|제목=‘경복궁’ 초기 모습 알려주마?|날짜=2002-12-27|출판사=주간동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