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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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년]], 재야에 묻혔을 때 [[장소]](張昭)와 함께 이장(二張)으로 불려, [[손책]](孫策)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 [[장소]]와 장굉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한 끝에 등용하였다. 장굉은 정의교위로 임명되었다.<ref name="s53"/> [[여포]](呂布)가 서주를 습격하여 서주목이 되자 장굉을 무재로 천거하였으나,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손책도 장굉을 아껴 여포에게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ref name="wz-s53"/>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령으로 당시 최대 군주인 [[조조]]가 있는 낙양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시어사가 되었고, 소부 [[공융]](孔融)과 친교를 맺었다.<ref name="s53"/> 사공 [[조조]](曹操)는 장굉을 천거하여 사공연으로 삼고, 나중에는 구강태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장굉은 손책의 옛 은혜로 말미암아 칭병하고 물러났다.<ref name="wz-s53"/>
[[200년]], 손책이 죽자 조조가 이를 틈타 오 땅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간하여, 이를 기회로 강동에 은혜를 베풀기를 주장했다.<ref name="s53"/>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손권을 토로장군·영 회계태수로 임명했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돕게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ref name="s53"/> 이후 [[손권]]을 섬겨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군에게 번번이 간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