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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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톰 시피|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ref name="Shippey, Tom 1991 page 2">Shippey, Tom (1991) Fictional Space. Essays on Contemporary Science Fiction, page 2, Humanities Press International, Inc., NJ</ref>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용문bquote|나는 모든 소설은…대영 제국의 영광을 기념하여 노래를 부르거나 교리를 설교하지 않는, 캐릭터를 다루며, 그리하여 소설이란 양식은 서투르고, 자세하며, 드라마틱하지 않고, 풍부하며, 탄성적이고, 생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는다. …위대한 소설가들은 캐릭터를 통해 독자에게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소설가가 되는 대신 시인, 역사가, 팸플릿 작성가가 됐을 것이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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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오슨 스콧 카드|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인용문bquote|…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직업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반대중이 아무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모든 이야기들이 이렇듯 단순 명료하게 표현된다면 문학 교수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며 애매모호한 문장을 쓰는 작가들은 동정은 얻되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ref>오슨 스콧 카드:엔더의 게임, 서문. 루비박스, 2008</ref>}}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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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그레고리 벤퍼드|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ref>Benford, Gregory (1998) "Meaning-Stuffed Dreams:Thomas Disch and the future of SF", New York Review of Science Fiction, September, Number 121, Vol. 11, No. 1</ref>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ref>Lethem, Jonathan (1998), "Close Encounters: The Squandered Promise of Science Fiction", Village Voice, June. Also reprinted in a slightly expanded version under the title "Why Can't We All Live Together?: A Vision of Genre Paradise Lost" in the New York Review of Science Fiction, September 1998, Number 121, Vol 11, No. 1.</ref> 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토머스 핀천|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아서 C. 클라크|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ref>조나단 레뎀, 놓쳐버린 SF의 희망, http://m.blog.naver.com/lunayi/30077832842</ref> 레뎀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SF&판타지 매거진]]》의 편집자는 "언제쯤 돼야 SF 장르는 메인스트림을 감동시키려는 시도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ref>Van Gelder, Gordon (1998) "Editorial," Fantasy and Science Fiction, October/November v95 #4/5 #567</ref> 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ref>Barnett, David. "Gaiman's choice: shouldn't good writing tell a story too?," The Guardian, London, 2010년 6월 23일,</ref>
 
{{인용문bquote| "문학적" 소설과 "장르" 소설 간의 끊임없는 전쟁은 모래 위에 그어진 뚜렷한 선과 같다. 장르계의 보병들은 문학적 소설을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무의미하지만 예쁘게 치장된 그림 컬렉션쯤으로 생각한다. 문학의 수호자들은 장르 소설을 천박하고, 상업적으로 훌륭한, 돈을 벌기 위한 작품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싸움은 계속된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ref>Barnett, David. "Science fiction: the genre that dare not speak its name," The Guardian, London, 2009년 1월 28일.</ref> 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