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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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과 왕실 ==
{{참고|종학}}
조선 시대 역대 왕은 유학의 진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가령 성균관을 예로 들어보면 태종은 친히 성균관에 가서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세자(世子)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의 알성례(謁聖禮)는 1414년(태조 14)부터, 세자의 입학례(入學禮)는 1421년(세종 3)부터 각각 상례(常例)가 되었다. 또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많은 전토(田土)와 노비(奴婢), 어장(漁場) 등을 지급함으로써 성균관을 원만하게 운영해 나가도록 적극 후원하였다. 한편 세종은 종실(宗室)의 자제들을 위해서 종학(宗學)을 설치, 도선(道善 : 정4품)<ref>정4품</ref> 이하 몇 명의 교관(敎官)을 두고 가르치게 하여 그 뒤에 오랫동안 계속된 적도 있었다.
 
== 기타 학문의 교육 ==
이와 같이 유학을 중심으로 한 문과 계통의 교육 기관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과(武科) 계통의 교육 기관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멸한 결과 생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특수 분야인 잡과(雜科)계통의 교육 기관으로서는 태종 때에 이학(吏學)·역학(譯學)·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의학(醫學)·자학(字學)·율학(律學)·산학(算學)·악학(樂學) 등의 교육을 위한 시설을 두었다. 그러나 잡과는 특수한 신분층이 이를 세습하였기 때문에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학(漢學 : )<ref>[[중국어]])</ref>·몽학(蒙學 : )<ref>[[몽고어]])</ref>·여진학(女眞學 : )<ref>[[만주어]])</ref>·왜학(倭學 : )<ref>[[일본어]])</ref>은 사역원(司譯院)과 어는 특정한 지방에서 의학(醫學)은 전의감·혜민서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은 관상감에서, 주학(籌學)<ref>산학(算學)</ref>은 호조(戶曹)에서, 율학(律學)은 형조와 지방의 각 고을에서, 화학(畵學)은 도화서(圖畵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각각 일정한 수의 학생을 가르쳤다.
 
== 개화기의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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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과학과 기술]]
* [[조선의 학문]]
== 참고 문헌 ==
 
{{글로벌세계대백과}} <!-- 글로벌세계대백과2|제목=〈조선 왕조의 통치기구〉 -->}}
==주석==
<references/>
 
{{글로벌세계대백과}} <!-- 〈조선 왕조의 통치기구〉 -->
[[분류:조선의 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