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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 [[서신일]] (徐神逸)
| 집성촌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br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br>[[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br>[[전라남도]] [[무안군]]</br>[[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br>[[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br>[[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br>[[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br>[[함경남도]] [[홍원군]]
| 인물 = [[서필]], [[서희]], [[서눌]], [[원목왕후]], [[서정 (고려)|서정]], [[서균 (고려)|서균]], [[서공]], [[서순]], [[서유]], [[서선]], [[서진 (조선)|서진]], [[서예원]], [[서일]], [[서민호]], [[서경원]], [[서용석]], [[서정갑 (1940년)|서정갑]], [[서한샘]], [[서길수]], [[서영명]], [[서균렬]], [[서경배]], [[서기호]]
| 인물 = [[서희]], [[원목왕후]], [[서일]] 등
| 인구 = 199,792명
| 년도 = 2015
| 비고 = [http://icheonseo.com/ 이천서씨 대종회]
}}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아들 [[서필]](徐弼), 손자 [[서희]](徐熙), 증손자 [[서눌]](徐訥)이 고려의 재상을 지냈다.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 역사 ==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 [[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고려의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94r_0010_0010_0090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ref>
 
== 인물 ==
* [[서필]](徐弼, 901년 ~ 965년) : 서신일이 80세에 낳은 아들. 고려초 도필(刀筆)로 출사했고, 광종(光宗) 때 내의령에 이르렀다.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 [[서희]](徐熙, 942년 ~ 998년) : 서필의 아들. 960년(광종 11)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93년(성종 12)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물리쳤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였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서눌]](徐訥, ? ~ 1042년) : 서희의 아들. 996년(성종 15)에 갑과로 급제하고, 국자좨주 지이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를 지내다가 딸이 고려 현종의 제6왕비 [[원목왕후]](元穆王后)가 되자 1022년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에 올랐다. 덕종 때 검교태사(檢校太師)가 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정종(靖宗) 때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가 되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원숙(元肅)이다.
* [[서공]](徐恭, ? ~ 1171년) : 서희의 현손으로서 음보로 출사하여,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역임하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 [[서유]](徐愈, 1356년 ~ 1411년) : 우부승지로서 이방원을 도와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410년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다.
* [[서선]](徐選, 1367년 ~ 1433년) : 139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 [[서일]](徐一, 1881 ~ 1921년) :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서일]](徐一, 1881 ~ 1921년)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918년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족보 ==
 
1763년 간행된 이천서씨 족보인 《계미보서(癸未譜序)》에는 서씨(徐氏) 성을 지닌 시조가 태어난 관향(貫鄕)을 크게 세 곳으로 꼽고 있다.<ref>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 〈癸未譜序〉,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一, p.28-31</ref>
 
{{인용문|“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상서우복야.정2품)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서씨(利川徐氏), 달성서씨(達城徐氏), 부여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 항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