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관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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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분 수정 // 그리고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를 다시 확인해 보니 Jhysoccer(본인)이 인용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는 2차 자료("교통사고나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문에 대해 해당 사실과 관련이 없는 언론인이 쓴 기사는 2차 자료입니다.")에 속함. 3차 자료도 인용하였음("1차 자료를 요약 정리한 백과사전과 같은 공개 발표물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 나온 자료는 1차사료로서 1차자료다. ("역사가가 로마 제국의 쇠퇴에 대해 해석하거나 역사 속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분석한 것도 2차 자료입니다"[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인용자의 '해석'은 인용이 아님에도 1차자료에 대한 위키백과 이용자의 해석을 반복적으로 "인용"이라 자의적 주장/특정견해 존재여부는 상관없고 오직 특정견해의 "인용"여부만 관렴있음./인용이 아닌 위키백과 이용자의 해석은 무조건 금지이고 병립도 금지/친일인명사전의 편찬위원은 150여명인데 위키백과에 기술된 친일파설 학자는 겨우 3명, 언론이 포함해도 겨우 4명이다. 150여명 vs 4명 중 후자가 소수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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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891년]] [[1월 18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평양직할시|평양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1050020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1-05&officeId=00020&pageNo=2&printNo=3599&publishType=00020 上海의 中央에 朝鮮人大商會] [[동아일보]], 1931년 1월 5일 작성</ref>
| 사망일 = [[1933년]] [[8월 1일]]
| 사망지 =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 별칭 = 옥혜관
| 경력 =
|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상해대한교민단]]
| 학력 =
| 직업 = 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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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관빈'''(玉觀彬, [[1891년]] [[1월 18일]]<ref>[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4&actionType=name&indpnId=0000003051 경성지방법원 판결문]</ref> ~- [[1933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업인이다기업인이었다. 별칭은[[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의 한사람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1864년)|이승훈]]·임치정 등 6명과 함께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ref>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한길사, 2009) 35페이지</ref> 그러나 나중에 그는 밀정으로 변질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150여명의 전문가들의 조사와 진상규명결과 친일파설은 혐의없음판정을 '옥혜관'이다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다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11년]]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1864년)|이승훈]]·[[임치정]]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1917년]] [[11월 24일]] 최종 석방되었다.<ref name=":2" /> 1920년대부터는 [[상해대한교민단]]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후원활동을 하였고, 삼덕양행(三德洋行) 등 개인 사업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뤘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흑색공포단]] 소속의 [[오면직]](吳冕植, 일명 양여주 楊汝舟)와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 嚴亨淳)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또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고 다니기도 했다.<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 그 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발설했다고 주장됐으며, 그를 추척하던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별칭은 '옥혜관'이다.
 
== 생애 ==
=== 애국 계몽 활동 ===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 뒤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예수교회의 전국대회는 구실이었고 그 내실은 '을사 5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ref name="chinyy21">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1페이지</ref> 이때에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順萬), [[이준 (1859년)|이준]](李儁), [[이동녕]](李東寧), [[김구]](金龜),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집(金仁楫), 옥관빈,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조성환]] 등이었다.<ref name="chinyy21"/>
 
=== 언론, 계몽 활동 ===
[[1906년]](광무 9년)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운강(雲崗)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매일신보]]의 집필진의 한사람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당시 [[매일신보]]의 편집진은 [[박은식]], 최익(崔益), 옥관빈, 변일(卞一), [[신채호]], [[장도빈]](張道斌) 등이 있었고 영업진에는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안태국]] 등이 있었다.
{{참고|대한매일신보|청년학우회|흥사단|신민회|105인 사건}}
[[1906년]](광무 9년)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운강(雲崗)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매일신보]]의 집필진의 한사람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당시 [[매일신보]]의 편집진은 박은식(朴殷植), 최익(崔益), 옥관빈(玉觀彬), 변일(卞一), [[신채호]], [[장도빈]](張道斌) 등이 있었고 영업진에는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안태국(安泰國) 등이 있었다.
 
[[신채호]]는신채호는 황성신문이 정간당하자 곧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박은식]], [[최익]](崔翼), 옥관빈, [[장도빈]] 등과 함께 불을 뿜는 듯한 항일의 붓을 휘둘렀다.<ref>송건호,《송건호전집 15》 (한길사, 2002) 381페이지</ref> [[신채호]] 등의 영입으로 《매일신보》는매일신보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그는 수시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야욕을 조롱하는 글을 올려 일제 당국의 감시를 당했다.
 
[[1909년]](융희 3년) [[안창호]]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고 서기에 취임하였다.서기<ref>[http://100.naver.com/100.nhn?docid=146368 청년학우회]{{깨진 인용링크|url=http://encykorea100.aksnaver.accom/100.kr/Contents/Item/E0056315|제목=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nhn?docid=146368 }}</ref>에 취임하였다. 이어 [[청년학우회]]가 [[흥사단]]으로 바뀌자 [[흥사단]]의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105인 사건과체포와 투옥 (1910~1917) ====
{{참고|안명근 사건|신민회|105인 사건}}
[[1910년]] [[12월 27일]] [[일본 제국|일제]]는 기호파 민족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안명근사건]](안악사건)을 일으켰다. [[일본 제국|일제]]는 곧바로 [[105인 사건|신민회사건]](105인사건)을 기획하여 서북파 민족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옥관빈은 [[105인 사건|신민회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평안남도 (일제 강점기)|평안남도]]에서 [[안태국]]과 함께 체포되었다.<ref>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36페이지</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01_01_0020|제목=安明根事件(安岳事件)을 계기로 黃海道 일대의 애국지사를 체포구금한 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열차에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송, 고문을 당했으나(출처 필요)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0년]]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평안남도]]에서 [[안태국]]과 함께 체포되었다.<ref>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36페이지</ref> 열차에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 관련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옥관빈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07_22_0550|제목=京城地方裁判所에서 安明根 등 18名에 관한 强盜 및 同未逐被告事件과 梁起鐸 등 16名에 관한 保安法違反被告事件에 대한 판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 뒤 보안사건으로 또 재판을 받을 때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화]], [[감익룡]] 등과 함께 출석했다.<ref name="baekku361">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61페이지</ref> 이때 그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등과 함께 2년형을 선고받았다.<ref name="baekku361"/>
[[1911년]] [[10월 18일]] 옥관빈은 보안법 및 총독모살미수죄를 적용받아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징역 5~10년형을 선고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10_18_0290|제목=新民會 事件으로 기소된 122인에 대한 재판에서 塚原재판장은 105인에 대하여 保安法과總督謀殺未遂罪를 적용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 뒤 보안사건으로2년형을 살고 재판을있던 받을 때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안태국]], [[김구]],등과 [[김홍량]],유배형에 [[주진수]],처했던 [[김도희]],이승훈 [[김용규]], [[고정화]], [[정달화]], [[감익룡(1864년)|이승훈]] 등과 함께 출석했다.다시 이때끌려가 그는심문을 [[양기탁]], [[안태국]], [[김구]] 등과 함께 2년형을 선고받았다당했다.<ref name="baekku361">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61페이지374페이지</ref> 그 뒤 2년형을 살고 있던 중 [[양기탁1913년]], [[안태국7월 15일]] 등과열린 유배형에공소심 처했던최종 공판에서 [[윤치호]], [[이승훈 (1864년)|이승훈]], 등과[[양기탁]], 함께임치정, 다시안태국 끌려가 심문을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는 당했다징역 5년이 선고되고, 나머지 99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ref>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74페이지376페이지</ref> 그는 4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활동 ====
[[1913년]] [[3월 20일]] 최종 공판에서 [[윤치호]], [[이승훈 (1864년)|이승훈]], [[양기탁]], [[임치정]], [[이승훈 (1864년)|이승훈]], [[안태국]] 등 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나머지 99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2_1913_03_20_0590|제목=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世稱 新民會事件 或은 105人事件)의 控訴 公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참고|상하이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신문}}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상하이 임시 정부]] 창립에 가담하였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독립신문]]사의 총무로 참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에 대해 창조파와 개조파, 고수파가 논란이 벌어지자 그는 임정 고수파의 한사람으로 잔류하였다. 국민대표대회는 이런 저런 요구를 임정에 하였고, 그는 임정 고수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초 [[안창호]], [[신익희]], [[김구]], [[원세훈]], [[김규식]], [[오영선]], [[이탁]], [[이동녕]], [[여운형]], [[조소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9693&mobile&categoryId=1593 시사책진회]</ref> 그러나 [[시사책진회]]는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그해 [[8월 11일]] 해산된다.
[[1913년]] [[7월 15일]] [[윤치호]], [[이승훈 (1864년)|이승훈]], [[양기탁]], [[임치정]], [[이승훈 (1864년)|이승훈]], [[안태국]] 등 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고, 나머지 99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ref>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76페이지</ref> 단 매일신보에 따르면 옥관빈 포함 6명 모두 징역 6년형(미결구류일수 180일은 형기에서 공제)을 선고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2_1913_07_15_0420|제목=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의 被告 尹致昊梁起鐸林蚩正李昇薰安泰國玉觀彬等 6名의 控訴公判이 大邱覆審法院에서 開廷되었는데 被告 6名에 各 懲役6年(未決拘留日數 180日은 刑期에서 控除)을 言渡하다. 被告等은 이에 不服 卽日 高等法院에 다시 上告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22년]] [[6월 19일]] 옥관빈은 유호청년대회 앞으로 보낸 건의서에서, 1 의정원 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2 각지에 통보해 의원 및 명사를 (새로) 선출하게 하여 의정원을 충실하게 하며, 3 헌법제도를 수정하여 시의에 맞도록 하고, 4 대통령의 임기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yory224">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24페이지</ref> 또 의정원이 충실해져 시국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청년대회에서 선출한 위원이 국무원의 사무직권을 수행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ref name="yory224"/>
[[1917년]] [[11월 24일]] 옥관빈은 최종 석방되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3_1917_11_24_0250|제목=新民會事件으로 복역 중이던 尹致昊梁起鐸安泰國李昇薰林蚩正玉觀彬이 4년 7개월 15일로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옥관빈의 명성을 보고 직접 함께 활동해본 도산 [[안창호]]는 여러번 옥관빈을 찾아가 자신의 [[흥사단]]에 가입할 것을 권고했다. 옥관빈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흥사단]]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임시정부]] 문제를 놓고 안창호가 개조론에 섰을 때는 개조론에 서지는 않는다.
==== 상해한인교민단 활동 및 독립운동단 지원 (1918~1928) ====
이후 옥관빈은 [[상해 임시 정부]]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관여했지만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고, [[안창호]] 계열과 결을 같이 했지만 [[흥사단]]에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다. 옥관빈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산하 단체인 [[상해대한교민단]]을 위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계 내부의 세력 다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후 독립운동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고, [[상해 임시 정부]] 창립에 가담하였다. 또한 [[상해 임시 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독립신문]]사의 총무로 참여하였다.
 
==== 임정 이탈 이후 ====
[[1920년]] [[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제1회 정기총회 3일차에 옥관빈의 부의장직 사퇴가 수리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02_25_0850|제목=大韓民國臨時議政院 第1回定期總會 第3日의 會議狀況은 다음과 같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임정 이탈 이후에도 그는 임정과 관계하려 하였다.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과 [[인성학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제의해왔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ref> 그러나 중론에 따라 [[인성학교]]는 그 돈을 받았고 임정은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 그해 [[12월]] 무역회사인 합명회사배달공사(合名會社倍達公司)를 개업하고 총경리(總經理)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상하이에서 독일과의 무역을 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 제조 업체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하는 자본금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모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당시 각종 사회사업에도 돈을 투자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하이]] 한인 교민사회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혜관'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1923년]]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수공업진흥책에 대하여(전 3회)'라는 주제로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였다.<ref>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9) 68페이지</ref>
[[1921년]] [[9월 19일]] 옥관빈은 [[상해대한교민단]] 본구의원에 당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9_19_0430|제목=上海僑民團의 議事員을 改選하다. 當選者는 다음과 같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러나 임정과 인성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는 말을 하게 된다는 증언이 있다.
[[1921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안창호]] 계열로 분류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f_088_1020|제목=僭稱上海假政府 幹部의 黨派別|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26년]] [[10월 8일]] [[안창호]]가 [[지린성]](길림성)에서 군사단체를 조직하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어서 [[안창호]] 지지자들이 성토문을 제출한 적이 있다. 이 성토문에도 옥관빈은 [[안창호]] 계열로 나타난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f_091_0220|제목=安昌浩聲討文 譯文送付의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하지만 옥관빈이 [[안창호]]의 [[흥사단]]에 깊이 발 담갔는지는 부정확하다.
 
{{인용문2|[[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ref name="hoi40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ref name="hoi405">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5페이지</ref>}}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과 [[인성학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제의해왔다.<ref name="hoi404">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ref> 그러나 중론에 따라 [[인성학교]]는 그 돈을 받았고 임정은 받지 않았다.<ref name="hoi404" /> 그해 [[12월]] 무역회사인 합명회사배달공사(合名會社倍達公司)를 개업하고 총경리(總經理)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상하이에서 독일과의 무역을 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 제조 업체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하는 자본금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모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당시 각종 사회사업에도 돈을 투자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하이]] 한인 교민사회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혜관'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1922년]] [[3월 1일]] 옥관빈은 [[상하이시|상하이]]에 배달공사(倍達公司)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대표로서 축사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3_01_0060|제목=上海에서 玉觀彬이 倍達公司의 設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다. 玉觀彬은 同 公司의 代表이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증언 ====
임정과 인성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는 말을 하게 된다.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ref name="hoi404" /><ref name="hoi405">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5페이지</ref>
{{참고|흥사단}}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ref name="hoi40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5"/>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무역업으로 매상을 올려 재산이 계속 늘었다.
 
임정의 처지가 딱해진 것을 알게 된 [[안창호]]는 임정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역시 임정 창립멤버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자고 여러번 권고하여 임정에서는 난처해하기도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쪼들리자 그는 [[김구]]에게 [[아편]]같은 마약 밀매로 돈을 벌어보는 것은 어떤지를 물었다. 아편장사를 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겼던 [[김구]]는 그의 제안에 분노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도 임정에서 미국에 마약밀매를 해보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이승만]]은 대답도 하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당시 그는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5"/>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5"/>
[[1922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논하기 위해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옥관빈은 [[안창호]], [[신익희]], [[원세훈]], [[오영선]], 이탁(李鐸), [[여운형]], [[이동녕]],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사책진회]]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해 [[8월 11일]] 해체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7_99_0680|제목=이 달 上海에서 時事策進會에 대하여 呂運亨과 都寅權이 다음과 같이 言明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378|제목=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ref name="hoi405"/>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ref name="hoi405"/>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ref name="hoi405"/>
[[1922년]] [[6월 19일]] 옥관빈은 [[대한청년대회]]에게 '잠시 혁명단체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위기를 구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의원을 전부 사직시킬 것', '각지에 통고하여 의원과 명사를 (새로) 선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을 완전 충실케 할 것', '헌법제도를 수정하여 시의에 맞게 할 것', '대통령의 임기를 정하고 개선할 것'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개조를 건의했다.<ref name="yory224">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24페이지</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6_19_0610|제목=上海에서 玉觀彬이 大韓靑年大會에 大略 다음과 같은 內容의 建議書를 提出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23년]]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수공업진흥책에 대하여(전 3회)'라는 주제로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였다.<ref>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9) 68페이지</ref>
 
[[1923년]] [[10월 24일]] 내무총장 [[김구]] 입회 하에 [[상해대한교민단]] 제4회 의원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옥관빈은 북구의원에 당선되었다. [[김승학]]·[[여운형]]·[[윤기섭]]·[[안정근]]·옥성빈(玉成彬)·[[조완구]] 등은 본구에, 변동화(邊東華) 등은 동구에, 민제호(閔濟鎬)는 서구에 각각 당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7_1923_10_24_0550|제목=臨時政府 內務總長 立會下에 上海僑民團 第4回 議員總選擧를 실시하였는 바 本區에서 趙尙燮金承學尹琦燮呂運亨崔錫淳李奎瑞安定根玉成彬白基俊金朋濬趙琬九, 東區에서 邊東華黃在健, 西區에서 閔濟鎬, 北區에서 玉觀彬이 당선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독립운동단 간의 갈등 (1929~1932) ====
[[옥관빈]]은 192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9년]] [[4월 20일]] 옥관빈은 조상섭(趙尙燮)·전용덕(田龍德)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던 30여명과 함께 [[상하이시|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근처에서 모여 한국상인의 친목도모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자금조달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상해고려상업회의소(上海高麗商業會議所)를 조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393|제목=상해고려상업회의소(上海高麗商業會議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그러자 [[1929년]] [[7월 25일]]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재중국한인청년동맹(在中國韓人靑年同盟)은 '상해고려상업회의소는 조선 경제를 착취하는 일본인의 어용적인 기관이자 일본인-조선인 융화기관으로 조직된 것'이라며 옥관빈 측에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또한 [[상해대한교민단]]이 [[6·10 만세운동]] 기념식 거행을 부결시킨 일도 비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92_0010_00150|제목=대한민국 11년(1929) 주요사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당시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ref name="hoi405" />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ref name="hoi404" /><ref name="hoi405" />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무역업으로 매상을 올려 재산이 계속 늘었다.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ref name="hoi405" />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ref name="hoi405" />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ref name="hoi405" />
 
=== 생애 후반 ===
==== 일제에 대한 협력 의혹 ====
[[1933년]] [[7월 22일]]~[[7월 23일]] 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ref name="inlgun00273">한국민족운동사학회 저, 《1930년대 예술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3) 273페이지</ref> 이에 [[오면직]]과 [[엄형순]]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inlgun00273"/>
 
==== 친일파 변절 (1933)최후 ====
상해삼덕양행(三德洋行)을 운영하며 일본인들과도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다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 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발설했으며, [[1933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근처에 살던 [[흥사단]]원인 다른 독립운동가 이모의 부인과 간통하고 나오던 중, 그를 추척하던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상해대한교민단]]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재무부장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세력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이봉창 의거]] 등을 위해 [[1932년]] [[1월 11일]] 교민단을 독립운동기관으로서 개편, 민단장직은 [[이유필]]이 맡고 [[김구]]는 의경대장직을 맡았다. [[김구]]가 교민단을 자치단체가 아닌 독립운동기관으로 활용하자 비난하는 교민들이 있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1_0010_00730|제목=73) 大韓僑民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250|제목=25. 재 上海 불령 조선인 교민단 일파의 불온계획에 관한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만약에 [[옥관빈]]이 친일파로 변절했다면 그 시기는 이 때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정화암의 사촌동생의 뒷집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8">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페이지</ref>
[[1933년]] [[7월 22일]]~[[7월 23일]] 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 이에 [[오면직]]과 [[엄순봉]]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ref name="inlgun00273">한국민족운동사학회 저, 《1930년대 예술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3) 273페이지</ref>
 
{{인용문2|백범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우리는 작전을 세웠지요. 양여주, 다른 이름으로는 [[오면직]], 그리고 [[엄형순]]이 옥관빈 살해의 책임을 맡았지요. 옥관빈의 동정을 살피기 두 달 뒤 우리는 이놈이 제 사촌동생 집 뒷쪽 정자칸방에 사는 [[흥사단]]원 이 아무개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음을 알아냈지요.<ref name="hoi408"/> 이 아무개는 [[한구]](漢口)의 조그만 세발자전거 공장을 열고 있어 집에 없었던 겁니다. [[1933년]] [[8월 1일]] 밤 열두 시가<ref name="hoi408"/> 넘은 깊은 밤, 정을 통하고 나오는 옥관빈을 [[엄형순]]이 그냥 쏘아 죽였지요.<ref name="hoi409">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9페이지</ref> 즉사지요.}}
==== 피살 (1933) ====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03_w0002_0390|제목=上海 法界에서 玉觀彬被殺, 친척의 집을 방문하려든 중 數名靑年이 突然狙擊[肖]|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3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1933년]] [[8월 1일]] 밤 12시(8월 2일 0시 경) 불조계의 이모씨의 처와 간통하고 나오던 중 이모의 집 근처에 숨어있던 [[엄순봉엄형순]]의 총격을 받았다. 총소리에 놀란 동네 주민들과 경찰관들이 '강도야! 도적이야!' 소리치며 몰려오자 [[엄형순]]은 '강도가 저 쪽으로 뜁디다'고 말하고는 유유하게 나왔다나왔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9"/>김학준, 《혁명가들의[[정화암]]은 항일 회상》옥관빈의 (민음사,죄상이 2005)이러이러해서 409페이지[[서간단]]이 죽였노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hoi409"/>
 
사촌 형 옥성빈 등도 역시 밀정 혐의로 [[남화한인연맹]] 단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불조계 공부국에서 형사로 근무하던 옥관빈의 형 [[옥성빈]]은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933년]] [[12월 18일]] 김해산(金海山, 金文熙)의 집 입구 노상에서 저격했<ref name="inlgun00273"/>던 것이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정화암]]의 사촌동생의 뒷집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흥사단원인 이모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작은 세발 자전거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가 공장 일을 보러 가는 사이 그의 부인과 간통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백범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우리는 작전을 세웠지요. 양여주, 다른 이름으로는 [[오면직]], 그리고 [[엄형순]]이 옥관빈 살해의 책임을 맡았지요. 옥관빈의 동정을 살피기 두 달 뒤 우리는 이놈이 제 사촌동생 집 뒷쪽 정자칸방에 사는 [[흥사단]]원 이 아무개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음을 알아냈지요. 이 아무개는 [[한구]](漢口)의 조그만 세발자전거 공장을 열고 있어 집에 없었던 겁니다. [[1933년]] [[8월 1일]] 밤 열두 시가 넘은 깊은 밤, 정을 통하고 나오는 옥관빈을 [[엄형순]]이 그냥 쏘아 죽였지요. 즉사지요."<ref name="hoi409" /><ref name="hoi408">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페이지</ref>
 
옥관빈 피살 사건은 그가 [[기독교]]계 실력자이던 관계로 [[상하이]] 한국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ref name="oklee94">이호룡,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서해문집, 2008) 94페이지</ref>
 
=== 사후 ===
시신은 철도를 통해 육로로 운구되어 [[신의주]]를 거쳐 그해 [[10월]] [[평양]]에 도착, 중화군에 안장되었다.
==== 옥관빈 피살 사건의 원인 ====
옥관빈 피살 사건은 [[윤봉길 의거]]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에 대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김구파와 무정부주의파의 숙청 작업 중 하나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김구파와 무정부주의파가 친일파 숙청 작업을 핑계로 서북파에 대한 테러를 병행했고 옥관빈이 그 희생자라는 의견도 있다. 2020년 현재까지 [[옥관빈]]이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한편 김구가 [[옥관빈]]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도 없다.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除奸團(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한편 [[8월 12일]] 옥관빈의 시신은 평양에 도착하여 중화군(中和郡)으로 이송되었으며 무진(무辰)땅에 안장될 거라고 보도되었다.<ref name="oklee94"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15_x0002_0820|제목=玉觀彬暗殺은 思想團所爲? 「○○除奸團 罪狀宣布로」 中國側에 一大衝動(上海)//玉觀彬氏屍體 平壤에 安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1933년]] [[8월 9일]] 상해연맹에서는 '한인제간단'의 명의로 '역도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각 방면에 살포하여 옥관빈의 주구적 죄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ref name="inlgun00273" />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ref name=":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ma_016_0370_0170|제목=玉觀彬氏의 豪語|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계속된 친일파 숙청 작업 ====
[[1933년]] [[8월 17일]] 석현구(石鉉九)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됐다. [[상해한국인친우회]] 위원장 [[유인발]](柳寅發)은 일련의 암살 사건이 [[상해대한교민단]]에 의한 것으로 보고 [[상해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대장 박창세(朴昌世)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박창세의 집엔 이수봉도 있었는데, 박창세와 이수봉은 '옥관빈 피살 사건은 [[안공근]]·[[박찬익 (1884년)|박찬익]]·[[엄항섭]] 등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제휴하고 감행한 것' 그리고 '김구 일파는 [[유인발]]도 암살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인발]]에게 '이러한 상황이므로 귀하([[유인발]])는 우리들과 합동하여 그들(김구파)을 전부 보는대로 암살하면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쌍방은 김구파에 항쟁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ref name=":34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860|제목=86. 上海 韓國人親友會 위원장 柳寅發 저격사건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러나 이것은 [[상해대한교민단]] 내 김구·[[안공근]]파인 박창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유인발]]을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1933년]] [[8월 31일]] [[유인발]]이 중국가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저격 당해 중상을 입었는데, 피해 현장에서 압수한 탄환의 탄피는 석현구 암살에 사용된 것과 완전 동일했다.<ref name=":34" />
 
[[1933년]] [[9월 4일]] [[상해한국인친우회]]는 프랑스 총영사 대리에게 공문을 보내 [[안공근]], [[엄항섭]], [[박찬익 (1884년)|박찬익]], 박창세(朴昌世), 이수봉(李秀峰), 이경산(李景山) 등 6명의 체포를 부탁하였고 이에 [[9월 5일]] 오전 6시 경찰부가 박창세의 집을 수색하였으나 박창세와 이수봉 모두 간밤에 도주하였다.<ref name=":3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860|제목=86. 上海 韓國人親友會 위원장 柳寅發 저격사건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9월 8일]] 김익성(金益星, 본명 김수산 金水山)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유인발]] 저격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는 [[쑤저우시|쑤저우]](소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880|제목=88. 한인 독립운동자의 ‘테러’단 훈련의 건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가을 옥관빈 암살 관련자인 이수봉(李秀峯), 김철(金哲) 등이 검거되었다.<ref name=":3" />
 
옥관빈 살해 사건은 그가 [[기독교]]계 실력자이던 관계로 [[상하이]] 한국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ref name="oklee94">이호룡,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서해문집, 2008) 94페이지</ref>
[[한인애국단]]과의 합작하에 이루어졌던 이 사건이 한인제간단의 명의로만 발표됨으로써, 이후 [[김구]]측과 상해연맹의 관계가 틀어져 [[1933년]] [[11월]] [[김구]]에 의해 [[오면직]]이 소환당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ref name="inlgun00273" /><ref name="oklee94" />
 
상해연맹에서는 [[8월 9일]]<ref name="oklee94"/> 한인제간단의 명의로 '역도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각 방면에 살포하여 옥관빈의 주구적 죄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ref name="inlgun00273"/> 옥관빈의 죄상으로 지목된 것을 6개조 죄목으로 만천하에 폭로했다.<ref name="oklee94"/>[[한인애국단]]과의 합작하에 이루어졌던 이 사건이 한인제간단의 명의로만 발표됨으로써, 이후 [[김구]]측과 상해연맹의 관계가 틀어져 [[1933년]] [[11월]] [[김구]]에 의해 오면직이 소환당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ref name="inlgun00273"/><ref name="oklee94"/>
[[1933년]] [[12월 18일]] 옥관빈의 친형 옥승빈도 밀정 혐의로 [[남화한인연맹]] 단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불조계 공부국에서 형사로 근무하던 옥관빈의 사촌 형 [[옥성빈]]은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김해산(金海山, 金文熙)의 집 입구 노상에서 암살당했다.<ref name="inlgun00273" />
 
== 논란평가 ==
[[정화암]]은 그를 '그는 원래 청년 독립운동가였는데, 어느 새 매국노가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교수이기도 한 [[이순탁]]은 [[1933년]]초 세계일주 당시 상해에서 당시 '40여개국 사람들이 모여서' 번성하는데, 조선인들이 여기 그중에 끼지못해 눈물겹다면서 상해교통대학에서 체육부주임으로 있던 신국권과 함께 옥관빈 두명의 성실성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순탁]]은 귀국후 이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포들의 노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 친일파 여부 ===
== 밀정여부 ==
2020년 현재까지 [[옥관빈]]이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 친일파 혹은 친일파 밀정여부에 대한 진상규명결과 ===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ref>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선 옥관빈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에는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나왔다.
*'''친일파가 아니다'''
** [[1933년]] [[9월 1일]] 삼천리 제5권 제9호는 독립운동가들이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했지만 옥관빈이 매몰차게 거절한 일로 원한을 사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ref name=":5" />
**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즈치(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반일파 대 친일파'가 아닌 '김구파(애국단) 대 비김구파(한독당)'로 보았다.<ref name=":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900|제목=90. 金九 일파의 愛國團 대 獨立黨의 알력 상황에 관한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2009년]]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옥관빈이 등재되지 않았다.
**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는 옥관빈이 등재되지 않았다.
** [[2012년]] 12월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上海시기 玉觀彬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上海시기 玉觀彬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성=김광재|이름=|날짜=2012년 12월 00일|판=한국근현대사연구 제63집|출판사=한국근현대사학회|쪽=42|장=}}</ref>
* '''친일파다'''
**[[정화암]]은 옥관빈을 "그는 원래 청년 독립운동가였는데, 어느 새 매국노가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
**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옥관빈을 [[친일파]]로 보았고, 석현구를 일본측 밀정으로 보았다.<ref name=":33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9월 5일]] [[동아일보]]는 [[유인발]]을 "친일단체 친우회([[상해한국인친우회]])의 관계자"라고 보도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9_05_x0002_1340|제목=被擊된 柳寅發은 친일단체 親友會의 關係者 ; 施高塔路에서(上海)|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38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1|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제목=孫世一의 비교 評傳 (5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월간조선|확인날짜=}}</ref>
**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09|장=}}</ref>
**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ref>검색결과 2020년 10월 18</ref>
=== 옥관빈 피살 사건과 김구의 연관성 ===
=== 소수설 ===
2020년 현재까지 [[김구]]가 옥관빈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에 비해 소수설에 의하면 옥관빈은 밀정이라고 한다. 이호룡은 옥관빈을 밀정이라 주장했다. <ref>이호룡, 한국독립운동의역사45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45/index.html?startpage=169</ref>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09|장=}}</ref>,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사학계 외부인인 언론인 겸 국회의원인 손세일은 옥관빈을 밀정이라 주장했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ref>
*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3_0030_01640|제목=164. 김규식 외무장이 리한에게 보낸 서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과 [[엄순봉]]이 [[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42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2|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