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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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벨라루스의 역사}}
'''루스국'''({{llang|orv|Рѹ́ськаѧРѹ́сьскаѧ землѧ|루스카야 제믈랴}}), 또는 '''키예프 루스'''({{llang|ru|Ки́евская Русь}}, {{llang|be|Кіеўская Русь}}, {{llang|uk|Київська Русь}})는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하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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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1세]]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인 [[스뱌토폴크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한 이후 [[정교회]]를 믿던 거의 대부분의 [[루스인]]들과 달리 [[로마 가톨릭]]을 믿던 [[폴란드 왕국]] 출신의 아내를 둔 영향으로 [[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렙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스뱌토폴크 1세]]는 민심을 잃었고, 결국 [[스뱌토폴크 1세]]는 [[1018년]] [[바랑기아인]] 용병을 주축으로 반란군을 일으킨 [[야로슬라프 1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한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 루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는데, 그는 키예프 루스의 국력을 향상시켰으며, [[동슬라브인]]들의 관습법들을 정리하여 만든 [[동슬라브족]] 최초의 성문법전인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편찬하였다. 또한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에 대규모의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대성당 (키예프)|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건축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 말기후기(1054년 ~ 1240년) ===
[[야로슬라프 1세]]가 죽은 후 [[1095년]]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한 중개 무역이 활성화되고 [[볼가 강]]을 통한 중개 무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키예프 루스 또한 쇠퇴하기 시작해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류리크 왕조]]의 분할상속제에 의해 여러 군소 공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1095년]]에는 [[흑해]]의 유목민족인 [[쿠만족]]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인 [[키예프]]가 약탈당했다.<ref name=아틀라스/> [[1113년]]에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블라디미르 (도시)|블라디미르]] 등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내치를 안정시키는 한편, 키예프 루스를 위협하던 [[쿠만인]]을 정벌하는 등 군사 활동에도 힘을 쏟으면서 키예프 루스는 잠시나마 중흥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키예프 루스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키예프 루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라츠크 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스몰렌스크 대공국]], [[페레야슬라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등의 [[류리크 왕조]] 출신의 제후들이 다스리는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난립하면서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가 되며 [[1237년]]부터는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루스인|루스]]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점령되었으며, 결국 [[1240년]]에 수도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였다.